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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산 출입금지 돌판

성전산 출입금지 돌판

문화와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성전은 한 나라의 문명의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성전 건축물은 한 나라가 구현할 수 있는 첨단 기술들이 집약적으로 녹아 있었기에 그 나라의 물질 문명의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통로입니다. 또 성전의 디자인은 한 나라의 정신문화를 녹여내는 틀이었기 때문에 정신문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 성전은 한 국가의 내부적으로는 예배의 공간이지만, 외부적으로는 특별히 그 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자기들의 모든 것을 한 곳에서 보여줄 수 국가 선전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이런 면에서는 고대 사회의 다른 성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헤롯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대단한 신앙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설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헤롯이 건설한 예수님 당시의 성전 역시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건축물과 비교해서 그 아름다움이 뒤지지 않았을뿐 더러, 거대한 돌들을 짜맞추기식으로 쌓아올린 기술력은 로마의 건축술보다 오히려 더 월등했기에 헤롯의 입장에서는 외국에서 온 이들이 더 많이 들어와서 봐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 헤롯의 성전 마당은 그 넓이가 대략 144,000m2(43,560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당은 안뜰과 바깥뜰로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깥뜰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둘이 구분 되었다고 해서 커다란 사각형의 면적을 반반씩 또는 몇대 몇으로 나누어 놓고 여기는 안뜰, 저기는 바깥뜰이라는 식으로 구분을 해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각형 형태의 땅 한 가운데에 좀 더 높은 토대를 만들어 제사를 드릴 거룩한 구역을 건축을 하고는 그 지역을 안뜰로 구별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깥뜰에 비교하여 안쪽 뜰을 특별히 더 거룩한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안뜰과 바깥들의 경계는 돌로 쌓은 낮은 담장이었습니다. 바깥뜰에 있는 외국인이 마음먹고 뛰어 넘어 들어간다거나 마치 유대인인척 열린 입구 어딘가를 통해서 들어간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발각이 되면 그 때는 거룩한 영역에 부정한 이방인이 들어간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죽음’이었거든요.

아직까지 이스라엘 땅이 오트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1871년에 끌레몽 가뉴(Charles Simon Clermont-Ganneau)가 성전산에서 그리스어로 쓰여진 완벽한 돌판을 하나 발굴했습니다. 가로가 약 84cm, 세로가 약 59cm가 되는 돌판인데요. 글자 한 개의 크기가 가로세로 약 4cm 정도가 되는 그리스어가 빼곡 하게 6줄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싼 담장과 성전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잡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죽음에 스스로 책임져야한다.”

이 출입금지 명령은 헤롯 당시의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도(눅 2:1; Augustus 63BCE-14CE: 통치 27BCE-14CE)가 승인한 것입니다. 헤롯은 아우구스도가 신임했던 유대아(Judea) 지방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래서 성전 완공 후에 아우구스도의 오른 팔이자 전쟁 영웅인 아그립바(Marcus Agrippa)를 축하 사절로 보냅니다. 아그립바는 아우구스도의 명령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로마 제국과 황제를 위해서 제사를 부탁하며 100마리의 황소를 제물로 바쳤는데,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2인자인 아그립바도 성전 마당에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안뜰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물만 인도해 주고서 제사 드리는 장소에는 함께 하지 못했던 셈입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안뜰은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던 영역이었으니까요.

이 돌판과 돌판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37-100CE)가 기록해 놓았습니다(J.W. 5.5.3; 6.2.4; Ant 17.11.5).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방인의 뜰’이라고도 불리는 바깥 뜰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돌담장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위의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적어 놓았거든요. 요세푸스가 말한 라틴어 경고판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지만, 그리스어 경고판이 발견되면서, 그의 역사 기록이 매우 신빙성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과 미쉬나(m. Sanh. 2:1–3)에서 설명하고 있는 성전의 대략적인 모습이 매우 역사적인 것이라는 점이 증명되었습니다.

요세푸스와 미쉬나에 근거하여 원래 있어야할 자리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불과 50m정도 떨어진 곳에서 완벽한 형태의 돌판이 발견되었고(1871년), 60여년이 지난 1935년에는 1871년에 발굴된 돌판과 같이 그리스어로 쓰여진 경고판이지만, 조각나 버린 것의 일부가 예루살렘의 사자문(Lion Gate) 바깥쪽에 무덤들이 있는 지역에서 발굴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는 바울 선생님께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편지하셨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편지에서 바울이 말한 ‘중간에 막힌 담’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율법’을 비유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비유의 객체는 바로 안뜰과 바깥뜰을 구분하던 이 돌담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정결함과 부정함으로 나누고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거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역과 핏줄로 구분되는 정결함과 부정함의 기준(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주님 앞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이 글을 읽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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