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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3] 이스라엘의 내전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3] 이스라엘의 내전

❖ 모든 것은 신앙의 지도자들로부터 

사사기를 시작하면서 설명하였던 것처럼, 사사기에서 3장부터 16장까지의 이야기는 사사들, 그러니까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리더인 사사들이 어떻게 점점 타락해가고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는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말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적인 메세지는 사사들의 이야기를 한데로 묶는 보따리의 역할을 하는 사사기의 앞과 뒤였습니다. 뒷 이야기는 종교 지도자인 레위 제사장들의 타락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미가의 집에서 벌어진 일들로 레위 제사장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권력에 의지하고, 그 권력으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을 쫓아 레위 제사장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하는 정결함 뿐 아니라, 순수한 신앙 마저 저버리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레위인다움,  제사장 다움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하는 지도자인 사사들이 타락한다손 치더라도, 신앙의 지도자들인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깨어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나약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잘못된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다윗을 찾아간 나단 선지자처럼 레위 제사장들이나 종교의 지도자들이 사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내쫓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들이 고발하는 사사 시대는 정치와 경제의 지도자들이나 신앙의 지도자들이나 너나할 것없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한 술 더 떠서 이 타락한 두 집단이 서로 유착하여 눈에 보이는 권력과 개인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삼아 이용하던 시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주인 삼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이방의 나라로부터 압제를 당하던 시대였고, 심지어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다툼과 전쟁까지 벌이던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3장부터 16장까지는 그나마 이스라엘 공동체가 압제하는 외부의 적과 싸우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레위인들의 종교적인 타락을 지적하는 이야기 뒤에는, 이 레위인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대규모의 내전까지 벌어집니다. 

    그러고보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신앙의 지도자인 레위들의 이야기를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내는 보따리의 뒤에 배치를 해 놓은 의도가 있는 것같아요. 정치와 군사, 경제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타락하게 된 그 밑바닥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지도자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타락이 있었다는 것을 고발하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사기 17장부터의 이야기에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고발하는 레위 제사장의 이야기는 목회자인 제가 말하기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매우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지적입니다. 

    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인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타락의 시대를 다시한번 “왕이 없었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왕이 신 하나님은 자기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도구가 되어 버렸고, 정작 하나님을 이용하는 레위 제사장들이 넘쳐나던 시대였으니까요. 

❖ 레위인, 그리고 그의 첩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레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살았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에브라임 산지 중에서 에브라임 땅에 속해 살던 레위인이라면, 세겜이나, 게셀, 깁사임과 벳호론 중의 하나일텐데, 사사기의 19장 이야기의 배경이 기브아인 것으로 보아서, 아마 이 레위인이 레위인의 성읍 중의 하나에 살았다는 가정 아래에서 세겜이나, 깁사임에 살던 사람이 아니었나 합니다. 물론 삿 17-18장을 보면, 꼭 그렇게 추측할 필요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레위 사람에게는 첩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이야기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첩(히. 필레게쉬 פִּֽלֶגֶ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합법적으로 결혼한 아내와는 대비가 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는 기억하실 것입니다(삿 8:31). 그러니 이 레위 사람은 합법적이지 않은 결혼으로 이 여인과 실질적인 부부 관계를 맺고 살았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흔히들 레위인, 그리고 레위인의 역할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제사장, 또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하는가를 알려주는 율법의 교사이기도 했고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판단하는 재판관이기도 했고요, 율법 어긴 사람들에게 내린 형벌을 집행하는 집행관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레 24:21에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을 죽인자는 그것을 물어주어야한다. 사람을 죽인자는 죽임을 당해야한다”라면서 누군가를 죽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로 “죽임을 당해야한다”라고 수동태를 사용하여 문장을 구성했습니다. 그럼 누군가가 그 죽이는 역할을 해야하는데요.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레위 사람입니다. 율법에 따라 형벌이 주어지면, 그것을 집행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면, 레위인들은 제의를 드리는 제사장이자,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인도자입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해박한 학자요, 하나님의 법대로 정결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재판관이자, 부정한 자들을 구별해 내고 그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하는 엄격한 법집행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레위 사람에게 첩이 있다니요! 그 엄격한 법 집행자가 ‘나는 예외!’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아니면, 모두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레위 사람 조차 그 문제에 대해서 경각심 없이 그들처럼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떤 모양이든,  율법과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정결한 삶,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고, 그것을 잘 지키는지를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레위 사람이 솔선수범(?)해서 가르침과 다른 길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이 시대가 레위인 마저도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시대였다는 것은 이미 미가 집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미가의 집에서 벌어진 그 엄청난 사건의 원인을 파고들면, 아마도 레위인의 가장 개인적인 가정의 삶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백번 양보해서, 성경에 “첩을 두지 말라”라는 법률이 특정되어 있지 않다손 치더라도, 이 레위과 그의 첩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하나님의 법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첩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행음했습니다. 여기서 ‘행음’했다는 말은 그냥 바람이 났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 창녀처럼 몸을 팔았다(히. 자나 זָנָה)는 말입니다. 율법에는 이럴 경우, 이 첩, 그리고 그 첩과 함께 동침한 남자 둘 모두를 죽이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신 22:22). 그런데 이 여자는 죽음이 두려웠는지 자기의 친정인 베들레헴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넉달이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남편은 레위인입니다. 이런 법 위반자들에게 그에 합당한 재판과 그 재판의 결과를 집행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법 집행에 ‘자신(레위) 예외’였습니다. 법률이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레위인들이 자기의 범죄에 대해서 스스로 관대한 것이지요. 남편인 레위 사람이 법에 따라 첩과 함께 행음한 남자, 그리고 자기의 첩에 대해서 율법에 따른 법 집행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다른 남자와 창녀와 같이 몸을 준 여자의 마음을 달래서 데려오려고, 자기의 종과 함께 나귀 두 마리를 끌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가 예사 롭지 않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고발하는 사사 시대의 레위인들은 단지 권력과 경제적인 이권을 추구하는 탐욕에만 취해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가르치는 성경의 원칙과 레위인 개인의 삶에 큰 틈새가 있었으며, 레위인들의 삶의 가장 최소의 단위인 가정부터 문제들이 만연해 있고, 도무지 풀 수 없을 정도로 엉클어져 있었습니다.

❖ 레위인의 정략결혼 

그렇다면, 이 레위인은 왜 합법적이지 않은 결혼 관계로 첩을 들였을까요? 성경에는 그 답이 나오지 않지만, 이것을 추측해 볼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삿 19:2)

“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삿 19:9)

우리말 성경에는 삿 19:2에서 레위인의 베들레헴 출신의 첩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이 베들레헴에 왔을 때, 장인이 사위를 붙잡으면서 내일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삿 19:9의 ‘그대의 집’이라는 말이 벽을 갖추고 마당을 두고 있는 ‘집’이 아니라, 염소털과 다른 털들로 엮어 짠 ‘장막'(히. 오헬 אֹהֶל)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위 사람은 장막에 거주하던 사람이고, 그의 첩은 잘 건축된 집에 살던 여자였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확하게 이 단어를 구별해서 대비를 지켜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결혼은 가난하지만 종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사회적인 지위를 올리고 싶었던 부자와의 정략 결혼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사랑하지 않는 결혼이었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맺어진 사실혼 관계였다는 것이지요.  레위인이 필요했던 것은 장인 어른 집안의 경제적인 도움이었을 뿐입니다. 정말로 70인역 성경을 번역한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삿 19:2도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라는 구절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을 떠나”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에는 사사기를 읽는 이들이 뒷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려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부요한 집에서 자란 여인이 장막에 거주하는 비교적 가난한 레위인과의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도저히 이런 장막에서는 더이상 못살겠다는 마음으로 뛰쳐나와 부요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거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고발하는 이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종교 지도자들의 세속적이고 한심한 모습은 그 뒤로 계속됩니다. 

❖ 베들레헴에서 기브아로 : 전통을 잃어가는 이스라엘 

레위 사람이 베들레헴으로 가자 장인이 레위 사람을 맞이하였습니다. 고대 사회의 유목민 전통을 아직도 많은 부분 보존하고 있는 사람들을 ‘베두인’이라고 부릅니다. ‘베두인’이라는 말은 ‘사막의 사람들’이라는 아랍어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에는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삼일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던 간에 말이지요. 그가 잘 알지 못하는 나그네라 할지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다시 길을 걸어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그들이 고대로부터 지켜온 광야의 전통이었습니다. 삼일이 지나면, 이제는 그 장막을 떠나거나, 조금 더 머무려면 그 집안의 일들을 도와야했는데요. 아마 사사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런 전통을 지켜나갔다면, 이 장인어른은 이 전통을 지킨 전통의 수호자요, 사위를 정말 극진하게 대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신분상승을 꿈꾸는 부자의 계산된 대접일 지라도 말이지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켜온 전통에 따라서 삼일 동안 사위를 잘 대접했을 뿐 아니라, 네째 날도, 다섯 째 날도 심지어는 여섯째 날도 대접하려고 했던 사람이예요. 그야 말로 최고의 대접이지요. 레위 사람의 장인이 단지 돈이 많아서 이렇게 환대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넓은 마음으로 사회적인 약자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돕는 것은 아니니 말이지요.   

    레위인은 여섯째 날이 되기 전에 그 집을 떠납니다. 오후 늦게 해가 지기 머지 않은 시간에 서둘러 떠난 것으로 보아서 꼭 가야하는 특별한 일이 있었을 겁니다. 이 또한 성경에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합리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 레위인이 집나간 첩을 찾아올 때가 안식일이 끝난 후, 첫째날이었다면, 여섯째 날 저녁은 안식일이 시작이 되는 때입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무너진들, 그래도 레위 사람으로 지켜야할 안식일의 의무는 지켜야 했을 겁니다. 습관적일지라도 말이지요. 그러니 안식일이 시작하기 전에 출발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문제는 너무 늦게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해가 질 시간이 되자, 잠잘 곳을 위해서 가까운 여부스의 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여부스 사람의 성은 나중에 다윗이 점령하여 예루살렘이라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레위 사람은 여부스 사람의 성읍이 이스라엘 형제들의 성읍이 아닌 이방인의 도시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운 기브아나 라마로 가자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브아까지는 걸어서 대략 한시간, 그리고 라마까지는 대략 두 시간 정도의 거리였으니,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레위 사람이 도착한 기브아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매우 삭막한 곳이었습니다. 기브아의 성읍 광장에 앉아있었지만, 아무도 이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묵게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바로 앞의 성대한 대접과 기브아의 삭막함을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여기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대조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이스라엘의 세태가 있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에 대해서 단지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출 23:9), 신명기에서는 나그네를 사랑하고 지켜주라고 합니다(신 10:10).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에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는 과거의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역사를 기억하며, 보호받지 못하는 나그네의 두려움, 환대받지 못하는 나그네의 서러움을 공감하고,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을 대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들을 대접하면 과거를 기억하고, 이들을 환대하면서 역사를 반복하여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이런 환대의 전통이 사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를 잃어버린 겁니다. 

❖ 기브아의 한 노인의 집에서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다가 거리에서 노숙을 하게 될 처지의 레위인 부부를 만났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굳이 이 노인의 출신을 이야기합니다. 본래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사람인데, 베냐민 땅 기브아에 살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유산으로 받은 땅을 떠나 다른 지파의 땅에서 산다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겁니다. 그 사정도 아플텐데, 유산으로 받은 땅을 떠나면 그 때부터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에게 땅이 있기 만무합니다.  이미 그 땅에 본디 살던 사람들이 땅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노인은 아마 기브아 사람의 밭에서 일하다가 해질무렵 돌아오는 길이었나 봅니다. 나그네의 마음은 나그네가 압니다. 기브아 사람들 누구도 이 지나가는 나그네 부부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노인은 이 부부가 눈 밟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집에 들입니다. 

    그러나, 기브아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방 한칸 내주지 않던 기브아 사람들이 노인을 찾아왔습니다. 문을 두들기며 그 집에 들어온 레위 사람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성관계를 하겠답니다. 만약에 그 노인이 그 베냐민 지파 땅에서 그래도 한가닥 하고, 그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면, 불량배들이 와서 감히 그 문을 두들기면서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나그네의 삶을 사는 만만한 노인의 집에, 기브아의 어느 사람도 보호해 주지 않는 나그네들이 있으니, 그들을 만만하게 본 것이지요. 

    역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그런 나그네 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말이지요. 그 나그네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좀 살더니, 하나님께서 주인되시고,  그분이 주신 그 땅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 25:23)

알고보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모두가 그 땅의 나그네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땅에 잠시 거주하는, 나의 소유는 없고 잠시 하나님의 땅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스스로 그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되었고, 그들이 왕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인식할 필요도 없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들이 주인이고, 자기들이 왕이니까요. 그러고는 주변의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이 하듯 성관계를 폭력의 도구로 삼아 약자인 나그네를 학대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이 사라진 시대, 이제는 마치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던 이스라엘 공동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역사를 잊은 이스라엘 백성, 그래서 스스로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 나그네를 학대하는 공동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 사랑없는 결혼의 종말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내어 그 남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장인의 집을 나섰습니다. 잘 살아 보겠노라고 형식적으로나마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를 한 집안에 속한 재산으로 여긴다는 상식을 넘어서서, 그럼에도 한 남자가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위 사람에게 이 여인은 이용 가치로만 의미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부족한 경제력을 채워주는 여인이었고, 자기를 조금더 윤택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이용 가치 말입니다.  한 여자를 이용가치로 생각하는 남자라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내 여자를 내어주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실상입니다. 사사기를 읽으면서 제일 읽기 곤란하고 그냥 휙 지나가고 싶고, 건너 뛰어 버리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여인은 밤새도록 여러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 노인의 집 문앞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죽어 있는 것도 모르고, 아침에 문을 열고 나와서 “일어나라. 이제 가자.”(삿 19:28)라고 말하는 레위인을 머리 속에 그리면 몸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그리고 속으로 외칩니다. “너는 그러면 안되지. 이스라엘이 다 미쳐 돌아가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가장 정결해야하는 레위 사람 너는 그러면 안되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을 읽는 모든 성경을 읽는 이들이 그러하듯,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도 이 부분에 울분이 치밀었을 것입니다. 이 울분은 단지 기브아의 그 불량배 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 레위 사람도 그리고 그 노인도 이 울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 첩을 조각낸 레위인의 절반의 진실  

주검을 만지는 사람은 부정해집니다. 사람을 제외한 생명체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하며, 자기가 당시 입고 있던 옷도 다 빨아야 합니다(레 11). 부정한 것이 곧 다 죄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의 상태가 그렇다는 겁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상을 치르고 매장을 해야하는데 자연스럽게 시신과 접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정결해 질때까지 기다리고, 그 옷을 빨면 되는 일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은 다릅니다. 제사장들은 스스로 더럽히지 말아야합니다. 심지어는 가족이 죽었을 경우도 그 시신을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레 21-22). 사사기 19장의 레위 사람이 아론의 자손인지는 나와 있지 않으니,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가족이 죽었으니, 당연히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해떨어지기 전까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전통에서 가족된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자기 첩의 시신을 칼로 열두 토막을 내고, 이스라엘 온 지역으로 그것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례 절차와 방식을 보더라도, 시신은 온전한 상태로 매장하고, 그 뼈는 나중에 추스리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것이 죽은 이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의 시신을 매우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자기 분노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서 전쟁을 소집할 때 사용하던 방식입니다. 메소포타미아식 메시지 전달이에요. 시리아의 마리(Mari)라는 도시 국가의 왕의 왕실서고에서 발견된 편지에보면, 지원군이 일부러 늑장을 부리면서 전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지원군을 요청한 지휘관이 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지휘관은 왕에게 죄를 지어서 옥에 있는 사람 하나를 죽여서 그 머리를 잘라 오지 않는 지원군의 지휘관에게 보내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죽은 이 사람처럼 될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것이지요. 

    지금 레위 사람이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쟁 소집의 메세지 전달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 중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무개가 이런 일을 했다면, 아마 다들 관심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세지를 받고 기브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스바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순식간에 모여든 것을 보면, 이 레위인이 레위인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층에 속했고, 아마 모든 지파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었던 제사장이 아니었겠나 싶어요. 그렇다면 더 문제입니다. 가족의 시신 조차 만지는 것이 금지된 사람들이 제사장인데, 시체를 만지고 그 시체를 훼손까지 한데에다가, 제사장이 아니다손 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나아가야할 전통의 수호자인 레위인이 그 전통을 버리고 이웃 나라의 관습을 따라 살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이 레위인은 절반의 진실로 선동을 합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삿 20:5)

첫번째로, 비록 베냐민 사람들이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인 약자를 압제하였으며, 성경에서 금하는 같은 성 간의 성관계를 요구하는 등, 하나님의 백성같지 않은 사람들처럼 옳지 않은 행동하기는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레위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말은 없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레위인 스스로가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수는 있었겠지만,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였다.”라는 말은 대체로 거짓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레위 사람의 첩을 욕보여 죽게 하였다는 말은 사실입니다만, 그 앞서 자기가 자기 손으로 자기의 첩을 그들에게 내 주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누군가의 아내가 된 사실혼 관계의 여자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는 것은 율법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따르면, 기브아의 그 불량배들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이 사주를 하였거나, 방조하였다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마치 사실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레위인은 자기의 문제적인 행동은 슬쩍 덮어버린 것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레위 사람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그들의 뼛속 깊은 타락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 거짓이 만든 전쟁의 비참함 

이스라엘 공동체와 베냐민의 전쟁은 이런 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거룩한 레위 사람이 그의 첩과 함께 기브아로 갔는데, 기브아 사람들이 아무 이유없이 레위 사람을 죽이려 하였다더라.  그리고 그를 죽이지 못하자 그 첩을 죽였다네! 어떻게 우리 공동체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내전은 레위 사람의 절반의 진실, 대체로 거짓말에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전쟁의 결과는 전쟁에 참전한 베냐민 사람 사만 오천명 이상과 베냐민 지파의 온 성읍과 가축의 죽음이었습니다. 베냐민 사람들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연합군도 사만 명 이상이 이 전쟁에서 죽었거나 다쳤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끌던 정복 전쟁의 시대는 가나안의 적들,  공동체 바깥의 적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사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공동체 내부의 전쟁으로 그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양상은 이미 기드온의 시대 이후부터 그 싹이 보였습니다만, 레위인의 첩 사건을 통해서 사사 시대의 뒷쪽으로 갈수록 죄의식 없이 이런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로서의 연대는 무너졌고,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며, 때로는 같은 공동체의 다른 지파 사람들을 이용하는 시대를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죽이는 전쟁마저도 거리낌없이 일으키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 모든 전쟁이 그 레위인의 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전에 기브아에 모인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에 대한 진멸 전쟁을 선포하면서, 그들의 후손이 남지 않도록 그들과 결혼조차도 시키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들이 결정하고 하나님께 통보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들이 전쟁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찾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참조. 삿 20:7). 그저 전쟁을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 통보하는 구조인 거지요. 삿 20:18에서 하나님께 어느 지파가 먼저 앞장서서 올라갈 것인지를 물어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뉘앙스를 살려서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이 전쟁을 할지 하지 말아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를 한번도 묻지 않더니만, 이제 너희들끼리 전쟁을 다 정해 놓고서는 내게 와서 누가 전쟁에 앞장을 설지를 물어보는 거니? 그래 너희들이 너희들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유다가 맨 앞에 서서 해봐.” 정도로 말이지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전쟁에서 승리할 리가 만무하겠지요. 두번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세번째 전쟁을 앞두고서야 비로서 금식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을 울부짖고 찾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 사라질 위기의 베냐민 지파와 야베스 길르앗의 주민들 

전쟁의 결과 베냐민 사람들 중에서는 광야로 급히 도망갔던 육백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제가서 갑자기 생각이 났나 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중에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면서 큰 소리로 울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나를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한탄이지, 정말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본 것은 아닌가 봅니다. 물어 보았으면 답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의 답은 없으니 말이지요. 

    따지고보면, 하나님은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라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전쟁을 나가서 승리에 가깝게 되자 그들의 아드레날린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들고, 실행에 옮긴 것 뿐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 중, 단 한번도 하나님께 그 깊은 뜻을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열두 지파 연합으로서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붕괴된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다다르게 되니,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떠넘겨 버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왜 그러셨냐고 묻더니, 하나님은 아직 대답도 하지 않으셨는데, 다시 이들이 자기 나름의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미스바에서 모여 베냐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일 때, 갓 지파의 가문 중에서 야베스 길르앗의 주민들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 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동맹군은 야베스 길르앗의 사람들 모두를 죽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또 진멸하겠다는 겁니다(삿 21:11)! 앞서도 말했듯이, 진멸의 대상은 가나안의 원주민과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모든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얻게 되는 노략물에 대한 욕심과 탐욕이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정말 진멸해야할 것과는 친구한 채, 같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진멸시키겠다는 엉뚱한 발상을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만 빼고 말이지요! 그 여자들을 빼앗아서 광야로 도망가서 살아남은 베냐민 사람 육 백명에게 아내삼아 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도미노 처럼 무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 모든 의사결정에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이 자기들의 머리를 모아서 낸 묘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묘책은 결국 패착이었습니다. 한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한 가문을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리는 없습니다. 그저 강한 다수가 힘없는 소수를 짓밟는 일일뿐입니다. 

     그런데도 여자가 모자르니, 한다는 말이 실로에 가서 여인들이 춤을 추러 나올 때, 그 여인들을 붙들어 가지고 그들의 아내로 삼게 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나 데려가라는 말인데, 이것은 납치를 종용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말은 그 다음입니다. 납치를 하다가 혹 그 여자의 아버지들이나 형제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다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베냐민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전쟁에서 여자를 잡아다가 아내로 삼듯 여자들을 빼앗아 온 것이 아니니, 딸들을 그들의 아내로 삼도록 하여 주시오.”라고 말하시오. 그러면 우리(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들)도 실로의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딸들을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당신들이 맹세한 것을 스스로 깨뜨린 것도 아니오” 하고 대답하겠오.”(삿 21:22)

    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결혼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이런 강제적인 방식일 경우라 할지라도 율법은 그 여인과 여인의 집안에게 지불해야하는 배상이 있었습니다(신 22:28-29).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어기고 여인들을 납치해 가는 것을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로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이 명분을 만들어서 조용히 시키겠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런 괴물로 만들어 버렸을까요?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그렇게 진단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사결정의 최고 책임자인 사사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 제의의 지도자인 레위인 그리고 레위 제사장이나 모두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가 사사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오히려 자기들의 종으로 삼아 기득권과 정치 경제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자기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왕이 되어서 자기들의 눈에 보이기에 좋을 대로 행하던 시대가 바로 사사들의 시대였다는 것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진단한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사기의 맨 마지막이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것이 끝인가?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런 사사들의 악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맨 마지낙에는 듣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좋은 이야기로 끝맺음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다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삿 21:25)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어설픈 문학가처럼 억지로라도 이런 시대 속에서 희망을 찾으라고 교훈적인 메세지를 집어 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회복 될 것이라는 어떤 희망의 소식도 주지 않습니다. 기대 같아서는 이렇게 너희들이 나쁠지라도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주셔서 너희들을 회복시키겠고, 너희가 결국 내 백성이 될것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사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이야기가 거듭될 수록 계속 어두워지고, 계속 내리막을 향해 달려가고, 점점 더 불편해 집니다. 그리고 사사기라는 책의 끝맺음은 최악 중의 최악입니다. “정치 지도자, 군사 지도자, 경제적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이 타락했어. 그런데 너희 신앙의 지도자라고 하는 너희 레위인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야. 아니, 그 레위 사람들이라는 이들이 더해. 결국 이 모든 사단의 시작도 종교 지도자들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종교 지도자들이 묵인한 세상의 부정함이 결국 이렇게 만든거야. 그냥 너희들은 하나님 없는 백성, 왕이 없는 공동체일 뿐이지.” 사사기의 역사가는 이렇게 사사시대의 역사를 고발하며 어떤 희망도,  어떤 회개도 요청하지 않고 이 책을 끝맺습니다. 

❖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 

“그러면, 누가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역사책의 형식으로 모았던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사사들의 시대를 실랄하게 비판했던가? 모두가 온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사기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사사기’라는 역사의 형식을 띄고 있는 예언서를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로 묶은 이를 신명기적인 신학을 가진 역사가(Deuternomist)라고 부릅니다. 이 신명기적인 신학을 가진 역사가는 예언자적인 전통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Nicholson), 지혜 문학에 능통한 제사장 계열의 서기관 공동체의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Weinfeld).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위 제사장 계열의 사람들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요(Von Rad). 통합적으로 본다면,  예언자적 신학을 가지고 부패한 사회를 꿰뚫어 보며,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레위 제사장(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사기는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사기를 레위 제사장들의 자기 반성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단순하게 기록한 역사 나열이 아닙니다. 왜 이스라엘 공동체가 분열하게 되었고,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로부터 이스라엘 공동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유업을 잃어버렸고, 왜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에 잊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들과 기록들을 모은 것입니다. 이 기록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잊고 가나안 사람과 그 주변의 나라 사람들처럼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왕의 자리에 올라 자기의 눈에 좋아 보이는대로 살아가려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책망하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길의 앞에 서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던 ‘그(들)’은 곧 ‘나’입니다. 과거 선조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이고,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시대가 지금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과거 선조들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자신들과 같은 종교의 지도자들이 직무 유기를 하였고, 그들이 나태함과 타락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흔들었고, 그 공동체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임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도 여전히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있으며 답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겪고 있는 비극의 원인을 ‘과거의 그들’로 돌리는 것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신명기적인 신학을 가진 역사가가 활동하던 시대를 대략 페르시아 시대 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고레스의 칙령 이후, 유다 땅으로 돌아온 이들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는 신앙적인 기초를 닦으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세워야할 성전과 나라는 과거와는 같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과거를 되짚으며, 이 비극을 레위인 제사장인 자기의 조상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나’가 이 비극의 원인 제공자이며, ‘지금의 나’가 하나님의 공동체를 허물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과거이자, 현재입니다.

    종교 지도자인 레위 제사장들의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를 고발하는 것만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의무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내 선조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비극 속에서도 그 조그마한 공동체 안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을 하고, 그 안에서도 주도권을 잡으려는 암투가 벌어지는 한 복판에 ‘지금의 나’가 서있습니다. 과거로부터 가나안 땅 한 구석에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나 광야의 한 가운데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잘못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졌던 적은 없었습니다. 늘 정치, 경제, 군사, 종교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싸우는 이들 때문에 나라는 흔들렸고, 신앙은 무너졌고, 하나님의 공동체의 삶을 피폐해졌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사 시대의 레위 제사장 선조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가 내리막길로 향해 가속도를 붙이면서 내려갈 때, 하나님의 법과 말씀, 그리고 온전한 신앙으로 그들의 역사에 브레이크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수레에 올라타 함께 내려갔습니다. 아니,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했습니다. ‘지금의 나’도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사의 내리막 길에 멈춤 없이 달리는 수레를 더 힘차게 밀고 나가면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레 안에서 권력을 잡아 보겠노라고 아둥바둥 거리고 있습니다. 이제 ‘과거’의 선조들의 모습 속에서 ‘지금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내일을 바꾸어야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금의 나’와 나의 공동체가 맞이할 운명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눈으로 ‘과거의 나’의 역사를 바라보고 ‘지금의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고쳐가면서, ‘내일의 나’의 운명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나의 과거를 하나님의 눈으로 냉철하게 바라보고, 나의 현재를 하나님의 눈으로 직시하면서, 나의 미래를 하나님과 함께 계획하는 것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인 레위 제사장들이 역사를 마주하는 시각이었습니다. 과거에 선조들이 걸었던 길의 결과로 그들이 맞이한 미래가 오늘입니다. 오늘이 불행하다면, 그리고 내일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들처럼 살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미래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외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심을 잊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선조들이 걸었던 그 비극의 역사, 지금 경험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 이것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곧 예언입니다. 

13 이스라엘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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