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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비문

나사렛 비문

프랑스 루브르 (Louvre)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프뢰너 (Wilhelm Froehner)가 1878년에 그리스와 중동 지역의 유물들을 취급하는 고고학 유물상으로부터 대리석 돌판 하나를 사들였습니다. 자기의 개인 소장고에 보관하던 그 대리석판은 프뢰너가 죽고 난 다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요. 발견될 당시 이 대리석 석판에는 “1878년에 나사렛에서 온”이라는 메모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돌판은 그 이후로 ‘나사렛 비문’ (Nazareth Inscription) 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대리석 돌판에는 22줄에 걸쳐 그리스어가 쓰여있는데, 로마 황제의 칙령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무덤과 묘실에 대한 로마의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글씨의 필체를 보아서 대략 기원전 1세기 또는 기원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비록 “1878년에 나사렛에 온”이라는 메모가 쓰여 있기는 하였지만, 누구로부터 사들였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발굴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기록들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이 석판의 존재에 대해서 고고학자들 사이에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이 대리석 석판에 프뢰너가 “나사렛에서 온”이라고 적어놓기는 하였지만, 정말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나사렛에서 왔다고 과학적으로 증명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돌에는 나름대로 돌들만의 지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돌을 분석해 보면, 이 돌이 어디에서 떠낸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돌판이나 토기가 발견된 경우, 그 돌과 토기의 성분이 그 지역이나 그 지역 주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대리석 석판을 분석해 보았는데, 나사렛과는 너무나 떨어진 터키 지역의 코스(Kos) 섬에서 뜬 돌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분석을 토대로 한 부류의 학자들이 주장하기는, 이 칙령이 로마 배경에서 로마 제국의 터키 지역에서 발효되었던 칙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기원전 30년 대에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의 권력을 뒷배 삼아 코스 섬을 다스리던 통치자 니키아스(Nikia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정치가 가혹하여 그의 학정에 치를 떨던 섬의 주민들이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사망한 후 (31BCE), 더 이상 정치적으로 뒤를 봐줄 사람이 없는 니키아스가 죽자 (20BCE), 그의 무덤을 훼손하고 니키아스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헤쳐 끌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니키아스의 뼈들이 길거리에 내동댕이 쳐진 이야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당대의 로마 시인들이 이 사건을 노래했더랬습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신약성경의 아우구스도 황제)는 이런 야만적인 보복을 금지하는 칙령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로마의 매장 방식이 주로 화장이었고, 가족 묘의 형태는 로마의 무덤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칙령에서는 명시적으로 가족묘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나 소아시아의 매장 풍습과 맞지 않습니다. 또 무덤과 묘실을 막는 돌들을 두는 매장 방법은 전형적인 유대아(Judaea)식의 매장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부류의 학자들은 이 석비가 어디에서 발굴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유대아식의 매장 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로는 로마에서는 극 소수의 매우 부유한 사람들 만이 호화로운 개인 무덤 건축물(Mausoleum style tomb)을 소유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화려한 건축물에 침입하여서 그 안에 있는 사치스러운 부장품을 약탈하려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칙령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호화로운 무덤 건축물 역시 가족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무덤이었으므로 이 칙령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추측하기로는 아마도 이 칙령의 시작은 로마의 역사적인 정황과 연관이 되어 있었겠지만, 로마의 한 특정 지역을 위한 칙령이 아니라, 로마가 다스리는 전 영토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칙명이 내려 졌으며, 유대아 역시 이 칙령에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아 지역에는 특별히 가족묘 형식의 동굴 매장 형태가 반영된 칙령이 대리석판에 기록되어 로마로부터 전해 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칙령은 예수님 시대는 물론, 그 이후 시대에도 여전히 로마 사회에서 유효한 법으로 지켜졌습니다. 이 칙령을 이해한다면, 마태복음 28장의 한바탕 소동을 한 걸음더 들어가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다음,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뒤늦게 무덤이 빈 것을 알게 된 경비병들이 성에 들어가서는 대제사장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지요. 이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 해갔노라고 거짓말 할 것을 종용합니다 (마 28:11-15). 그런데, 이 거짓말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첫번째로는 예수님께서 그 예언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아마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두번째로는 자신들에게 날아올 비난의 화살이 두려웠을 겁니다. 그의 부활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알려진다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하는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하다고 우쭐대던 장로들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앞장서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인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유대아의 사람들도 가만 있을리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사렛 비문의 칙령은 아우구스도 황제(아우구스투스 Augustus 황제)의 시대로부터 예수님의 시대,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칙령에 따르면, 무덤이나 묘실을 훼손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무덤의 돌을 옮기고 시신을 옮긴 사람들이라고 고발한다면, 황제의 칙령을 어긴 셈이 되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겪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유대아에서 없앨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거짓말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꽤나 어려웠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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