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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Tithe מעשר

십일조 Tithe מעשר

얼마전 페이스북을 하다가 우연하게 “십일조”에 대한 뉴스 기사가 링크되었길래 그 선동적인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고발하면서 “십일조 무용론”에 가까운 성토를 보았습니다. 교회의 재정 운영에 대한 투명한 집행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십일조가 오늘날 교회의 상황에서 필요없다는 논조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기사를 작성한 이의 십일조에 대한 주장에 댓글을 통해서 누군가가 반박할만도 했는데, 대부분 목회자가 읽는 (목회자들이 주로 읽는다고 추정) 웹신문에 이렇다할 논리적인 대응이 없어서, 혹시 “십일조 무용론”이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아닌가하는 걱정에 “왜 십일조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필요한가?”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십일조라는 말은 어떤 뜻인가?

십일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아세르” מעשר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10이라는 숫자를 “에세르” עשר 라고 하는데, 그 십분의 일을 가리키는 단어가 “마아세르”입니다.

 

2. 십일조는 구약의 오경(율법서) 중에서 어디에서 나오는가?

2.1. 십일조에 대한 일화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쳐들어와 롯과 그 가족 그리고 그 재물들을 노략해서 갔을 때에 롯을 구하러 간 아브라함이 단까지 쫓아가서 쳐부수고 데메섹 왼편의 호바까지 쫓아가서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롯과 가족을 다 찾아온 후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멜기세덱에게 “마아세르”를 줍니다 (20절).

2.2. 또 야곱은 베델에서 잠을 자던 중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십일조를 서원합니다 (창 28장).

2.3.그 다음으로 십일조를 말하는 곳은 레위기 27장입니다. 레위기 27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나는 곡식과 나무의 열매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30절).

2.4. 민수기 18장에서는 레위인들이 드려야할 십일조에 대해서 말합니다. 레위인은 땅을 분배 받지 못한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기대에서 할 수 있는 생업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주어서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합니다 (21절). 그런 레위인들 조차도 그들이 받은 것에서 다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한다(26절)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는 이야기입니다.

2.5. 율법서의 맨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는 세 곳에서 십일조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 첫번째는 신명기 12장인데요. 곡식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의 십일조에 대한 규정을 이야기하면서 (17절), 이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십일조를 가져온 사람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 가족에 속한 노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8절). 그리고 이 십일조를 다 함께 먹을 때에는 아무 곳에서나 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먹을 것이며,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성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으라고 말합니다 (19절).

2.6. 신명기 14장에서는 십일조 규정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룹니다. 매년마다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면서 (22절), 구체적으로 곡식, 포두주, 그리고 (올리브) 기름을 이야기합니다. 신명기 12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이 십일조를 가져온 사람과 노비를 포함한 모든 식솔들이 함께 먹는것이 원칙인데, 이 때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성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이들이므로 잊지 말고 함께 나눌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12장과 거의 동일하지요. 다른 곳에서는 없지만, 신명기 14장에서 말하는 특별한 십일조 규정은 (1) 드려야할 곳이 너무나 멀어서 십일조 소산의 양이 너무 많아 가져가기가 힘들 경우, 드릴 십일조를 팔아서 돈으로 환전을 한 후에, 그 돈으로 십일조를 드릴 그 곳에서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2) 삼년 째에 드리는 십일조는 그냥 가족들이나 레위인들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축을 해 놓았다가 레위인을 포함하여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나그네들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삼년 째에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 26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12절).

 

3. 십일조를 말하는 이야기 또는 법령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J E P D
창 14:20 창 28:20-22 레 27:30-32; 민 18:21-28 신 12:6-17; 14:22-28; 26:12-13

십일조의 이야기와 법령은 J, E, P, D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교에서 이미 배운대로 알다시피 J와 E 는 원인론적인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왜 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창 14장에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P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십일조에 대한 제사장 (또는 레위인)의 태도에 대해서 규정합니다. D는 목축중심에서 상업중심으로 경제의 무게가 바뀌어 가는 갈림길에서 생겨난 사회적인 문제를 하나님의 율법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각 자료들의 특징을 중심으로 십일조를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3.1. 십일조를 왜 해야하는가? 원인론적인 이야기 (J)

십일조와 비슷한 제도는 이미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많은 나라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이집트, 바빌론, 앗시리아, 엘람, 페니키아에서는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그들의 신에게 바쳤거든요. 이스라엘의 이웃들 가운데에서 가장 이스라엘과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가나안의 사람들의 문화에서도 역시 십일조의 풍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문서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우가릿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대 서아시아의 나라와 심지어는 좀 멀다할 수 있는 그리스까지 신들에게 바치는 십일조 제도들을 찾아볼 수 있으니, 십일조라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만의 제도가 아니라, 고대 제국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인 제도였다는 겁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 제도는 일종의 “세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두개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십일조입니다. 이 흔적은 창세기 14장에서 아주 잘 묘사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이 종교적인 지도자였던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왕정이 세워지고 정치제도가 만들어진 후에 왕에게 바치는 십일조인데, 사무엘이 왕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왕의 백성들의 의무를 열거하며 국고로 들어가는 십일조의 의무를 말합니다 (삼상 8장).

왕에게 세금을 내는 이유는 세금을 내는 이가 그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이면서, 동시에 의무입니다. 왕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으면서 그 백성을 돌보는 책임이 주어지고, 백성들은 자기의 주인이 되는 왕에게 세금을 냄으로 그 충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령, 두 왕국의 경계가 되는 지역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도대체 어느 왕국에 속해 있는가 알아보고자 한다면, 그 마을 사람들이 어느 왕국의 관리에게 세금을 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십일조를 왜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것은 드리는 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3.2.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원인론적인 이야기 (E)

창세기 28장의 베델에서 야곱이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는 십일조가 자발적인 헌신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후에, 광야에서 받은 율법들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법률로서 체계화 되었지만, 그 이전의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법적 강제에 의해서 반드시 드려야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3.1.의 이야기와 3.2.의 원인론적인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살펴보면,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각인 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3. 십일조의 의미, 그리고 그 용례들 제사장들을 위한 지침 (P)

제사장 문서 (P) 는 제사장들이 ‘제의’라는 영역에서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준 지침서이면서, 동시에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러주어야할 가르침이었습니다. 곡식 뿐 아니라, 가축도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만약 십일조로 드려진 것을 물려야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이 이들의 책에 담겨져 있습니다 (레 27:30-32).

십일조의 용처는 레위 (제사장) 자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제적 이유. 이들은 땅으로 받을 유산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회막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거룩함은 그들에게 있지만, 그러한 종교적인 거룩한 자부심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는 아무것도 없는 레위인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노동에 대한 보수인 것이지요. (민 18:21-28).

종교적 이유.  다른 측면에서 또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거룩한 성물인 십일조는 그 자체로 매우 거룩했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것을 아무나 만지거나 다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사장의 신학에서 거룩한 시간은 안식일과 명절이며, 거룩한 물건은 성막에서 사용되는 기구들과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을 배출하고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이지요. 거룩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것들과 접촉하게 되면, 곧 그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제사장의 신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이들만이 거룩한 물건과 접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막에서 일하는 이들만이 그 거룩한 예물인 십일조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은 제사장의 신학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십일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제사장들 역시 십일조는 드려야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민 18:21-28). 십일조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보수였다고해서, 내 손에 들어온 그 십일조를 내 맘대로 처리하고나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회막에서 일하고 받은 보수일지라도 그 십일조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서 성물로 드려진 것이기에 비록 사유재산이 된 십일조라고 할 지라도 그 거룩함에 손상이 가지않도록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민 18:32).

3.4. 상업화된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하나님이 도우시는 방법 — 십일조 사용의 지침 (D)

제사장의 신학에서 십일조의 사회적인 의미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일할 수 없는 레위인들을 돕기위한 제도였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의 배경이 되는 광야 유랑의 시대에는 경제구조라는 것이 매우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먹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먹고 마셔야할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주거환경은 척박했지만, 경제환경은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들어가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도 더이상 없습니다. 예전에는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한가지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있다고 해도, 그보다 조금 더 먹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경제구조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생겨나고, 노예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인구는 점점 늘어났고, 십일조로 드려지는 곡식과 가축의 수도 부쩍 늘었습니다.

이렇게 사회의 구조가 바뀌면서 십일조도 그 쓰임새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시작한 제사장의 신학은 거룩한 제사장이 가지는 성물에 대한 거룩한 책임감이 가장 우선 순위였고, 거기에 구제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었지만, 제사장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이 거룩하다는 신학을 가지고 있는 신명기에서는 십일조의 소비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가져간 “나”도 그 십일조의 일부를 제사장과 함께 소비하고, 경제적인 약자인 레위인과 노예, 과부, 고아, 나그네들 역시 사회적인 구제의 일환으로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신 12:6-17; 14:22-28; 26:12-13). 그러니, 좀 짧게 말한다면, 거룩한 성도들의 교제와 박애적인 입장에서의 구제가 십일조의 중요한 역할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4. 끝맺음: 성서가 말하는 십일조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십일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구절을 펴놓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해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구절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배경, 신학적인 배경을 이해한다면 십일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인론의 이야기만으로는, 제사장의 신학만으로는, 신명기의 신학만으로는 십일조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네 개의 신학을 정리해서 하나로 엮어보자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인 동시에 (J, E),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지켜야하는 의무 (법)이며 (P, D), 거룩한 십일조는 그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하고 (P), 그 사용 역시 거룩한 공동체의 거룩한 교제와 구제를 위해서 사용되어야한다 (D).

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십일조는 사라져야한다.”는 괴이한 논리는 아마도 십일조의 사용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에 쉽사리 휩쓸리지 말고, 오히려 “성도로서” 십일조의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게 오늘날 내가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지, “교회로서” 십일조를 원래의 취지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반성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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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hes
This Post Has 40 Comments
  1. 덧붙여서 친구 목사의 지적에 대한 저의 답변인데요, 저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1. 성서를 대하는 구약시대의 독자들과 현대독자들이 직면한 경제/사회적 상황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약 600년이 넘는 JEDP의 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상황의 차이로 십일조를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이해했을지라도, 십일조를 그래서 드려야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되는가의 문제는 단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2.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라는 말은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말이 유효한가를 묻는다면, 뭐 할말이 없지요.

    3. 십일조가 쓰여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성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의 신학자들이 서로 논의해야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현대의 신학자들이 용처가 아닌, “십일조의 존치” 자체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 귀한 글 감사합니다. 십일조의 용처와 관련해서 연구를 해 오던 참이었는데 정리를 잘 해 주신 글을 만나 기쁩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의견을 하나 덧붙여 봅니다. 이에 대해 holinessscode님께서 고견을 주신다면, 열린 마음으로 배우기 원합니다.

      저는 성서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용처는 결국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 성서의 여러 곳에서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들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심지어는 십일조를 모두 레위인의 유산으로 주셨다고 말하고 있고–신명기 18:25)
      (2) 십일조를 가져 와서 하나님 앞에서 먹으라고 언급된 적이 있으나, 이 경우 역시 레위인들을 배려하라고 하셨습니다. (개인과 가족이 일회적으로 십일조를 모두 소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에, 현실적으로는 그 십일조의 많은 부분을 레위인들과 나눠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겠지요.)
      (3) 구제를 위한 십일조는 삼 년에 한 번씩 걷었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레위인이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용처의 근간 원칙은 레위인이라고 봅니다.
      물론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는 일과 구제를 위해서도 일부 사용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현대 사회에서 이 원칙이 지켜진다면,
      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이 더 건강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교회들이 십일조를 다른 곳에 쓰지 않고, 오직 레위인들과 구제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지요.

      (제가 알기로) 큰 교회의 십일조 수입은 자기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봉급을 주고도 남습니다.
      그렇기에 남은 재정은 이런 저런 사업을 위해 예산으로 편성됩니다.
      혹 건축이라도 하게 되면, 십일조의 상당 부분이 건축에 사용되지요.
      이는 건강한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라는 원칙이 견지된다면, 큰 교회들이 보다 화려하고 멋진 하드웨어의 대한 유혹으로부터 상당 부분 보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는 십일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으로 미자립 교회들의 사역자들을 지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자비량으로 섬기고 있는 선교 단체의 간사들이나,
      찬양/문화 사역자들에게 흘려 보낼 수도 있겠지요.

      저 역시 선교사입니다만,
      필드에서 보면 마땅한 교회 파송이나 재정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사역자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정말 귀한 분들도 많이 있는데,
      그 분들에게까지 교회의 십일조가 지원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들이 보다 더 많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현대의 레위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신학적 정의가 중요하겠지요.
      저는 그것을 “생계를 주님께 맡긴 채 전임으로 헌신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사역자들”로 정의해 봅니다.
      자기 유산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성서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결국 십일조를 통해서였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일부 사역자들에게 더 많은 재정을 주자는 취지가 아닙니다.
      재정 수입이 빈약한 사역자들에게 나누고 또 나누자는 취지입니다.

      이 원칙이 지켜진다면,
      교회도 살고 사역자들도 살고 하나님 나라도 더 확장되리라 믿습니다.

      1.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레위인들에게 십일조의 많은 부분이 사용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어떻게 십일조의 용처를 사용할지는 기도하면서 성경을 바탕으로 공동체가 함께 주님의 마음을 구하며 결정할 일인 듯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십일조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 (청지기로서의) 을 잊은 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꼭 필요한 곳에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 레위인이 곧 성직자이다와 교회 건물이 성전인지와 그리고 건축의 규격도 성경적인지등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분명 우리는 레위인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레위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더욱 보수적이 됩니다.

      3. 일부 부유한 성직자가
        모든 의혹의 뿌리가 된다고 봅니다
        거대교회
        세습
        왜 욕을 자처하나요
        존경받는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십일조는 말 그대로 의무는 아니라고 하시니
        신앙인 각자에게 맡기고요~

  2. 또다른 제 답변입니다.

    기독교회가 신약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로 구약의 십일조의 법이 간과되어서는 안됩니다. 자칫 21세기 마르시온 (Marcian) 주의일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신약위에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받치는 두 기둥이 구약과 신약인 것입니다.

  3. 초대 교회 이후로 십일조의 역사는 공부하셨는가요?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가 없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면 초대 교회 초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율법에 의해서라도 십일조를 받지 못합니다. 예루 살렘 성전 훼파후 유대인에게 더이상 십일조가 걷히지 않았습니다. 유대 회당에서는 원래부터 십일조는 같은 이유로 걷을 수 없었고요. 따라서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이 내지를 않는 십일조를 걷을 수 없었습니다. 저스틴 마터나 디다케에서 교회 생활을 묘사할때도 십일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걷기 시작한 것은 8세기 들어서 카톨릭이 교회 재정을 위해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글 쓰신 분은 사도들도 인식하지 못한 어떤 신학적 분석을 내놓고 그게 맞다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글 쓰신 분이 창조한 관념이지 신약 성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1.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초대 교회 이후의 십일조 역사를 어느 책으로 또는 누구로부터 공부하셨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더 도움이 될 듯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십일조를 걷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십일조가 의무의 개념에서 자발적인 헌신으로 바뀌어지기는 했어도, 걷히지 않았다는 것은 마치 nothing 을 뜻하는 듯하거든요. 유대교 회당에서 십일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마찬가지이고요. 관심을 가지고 코멘트를 해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무엇을 근거로 이야기하시는지를 알려주시면 제가 답변을 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이것을 가지고 논문을 쓸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1. 십일조는 성전에 내는건데 성전이 없어졌으니 십일조를 못내죠. 유대회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에는 제사장들이 일을 보고 유대회당은 평신도인 랍비가 중심이 된 곳이에요. 예루살렘 성전 훼파 후에 몇몇의 이스라엘 무장 회복 운동이 있었죠. 이런 무장 세력이 존재했을때는 그 지역에서 다시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점차 이러한 운동은 정벌되어 사라졌고 따라서 십일조도 사라졌습니다. 특히 로마가 유대인에게 집중적으로 십일조를 대신하는 세금(Fiscus Judaicus)을 매겼기 때문에 더욱 더 십일조를 할 수 없었죠. 그 후에도 유대인들이 성전이 없으므로 유대 회당중심으로 모일때도 구약의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없으니 받을 수 없었죠. 대신 말씀하신 것 처럼 의무가 아니라 “자원”으로 기부되었죠. 그러므로 구약 율법적 십일조는 폐지된 것이 맞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가 걷히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책과 사람들이 말하므로 일일히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한 책만 말하자면 You Mean I Dont Have to Tithe?, David Croteau 를 보세요. 거기에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가 걷히지 않다가 서서히 후대에 자발적인 십일조로 넘어갔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의무적인 십일조는 8세기에 가서나 나옵니다.

        인터넷에 각종 서적에 초대 교회 십일조 관행을 모은 글들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를 보세요. 이 문서의 p.5 를 보시면 각종 서적을 인용했습니다. 한번 보세요. http://www.bibleresearch.org/broadcasts/pdf/did_apostles_collect_tithes.pdf

        그리고 이 사이트에 댓글 다는게 왜 이렇게 힘듭니까? 수십번 시도하다가 에러가 자꾸나서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도 잘못된 정보가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시 씁니다.

      2. 십일조는 성전에 내는건데 성전이 없어졌으니 십일조를 못내죠. 유대회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에는 제사장들이 일을 보고 유대회당은 평신도인 랍비가 중심이 된 곳이에요. 예루살렘 성전 훼파 후에 몇몇의 이스라엘 무장 회복 운동이 있었죠. 이런 무장 세력이 존재했을때는 그 지역에서 다시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점차 이러한 운동은 정벌되어 사라졌고 따라서 십일조도 사라졌습니다. 특히 로마가 유대인에게 집중적으로 십일조를 대신하는 세금(Fiscus Judaicus)을 매겼기 때문에 더욱 더 십일조를 할 수 없었죠. 그 후에도 유대인들이 성전이 없으므로 유대 회당중심으로 모일때도 구약의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없으니 받을 수 없었죠. 대신 말씀하신 것 처럼 의무가 아니라 “자원”으로 기부되었죠. 그러므로 구약 율법적 십일조는 폐지된 것이 맞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가 걷히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책과 사람들이 말하므로 일일히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한 책만 말하자면 You Mean I Dont Have to Tithe?, David Croteau 를 보세요. 거기에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가 걷히지 않다가 서서히 후대에 자발적인 십일조로 넘어갔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의무적인 십일조는 8세기에 가서나 나옵니다.

        인터넷에 각종 서적에 초대 교회 십일조 관행을 모은 글들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를 보세요. 이 문서의 p.5 를 보시면 각종 서적을 인용했습니다. 한번 보세요. http://www.bibleresearch.org/broadcasts/pdf/did_apostles_collect_tithes.pdf

        그리고 이 사이트에 댓글 다는게 왜 이렇게 힘듭니까? 수십번 시도하다가 에러가 자꾸나서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도 잘못된 정보가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시 씁니다.

        1. 죄송합니다. 회원으로 등록되면 곧바로 댓글이 올라가는데, 비회원으로 등록되면 제가 일일이 댓글 승인을 눌러야합니다. 로봇이 자동댓글을 다는 거을 방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페이지 접속이 원활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제가 저렴한 서버를 사용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인 듯합니다. ^^; 링크를 걸어주신 글은 감사합니다. 제가 읽어보고 댓글 또는 포스팅해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학생이고, 지금 학기중인지라, 곧바로 글이 포스팅 되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꼭 빠른 시일 내에 꼭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이 글들이 하나님나라를 세워가기 위한 구원역사의 발전개념이 빠져있군요.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가지고 설명하지 못하면 평행선을 달리는 레일처럼 결론을 내지 못한답니다.

    1. 이 글은 구원사적인 입장에서 “십일조”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구약성경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고, 십일조가 가지는 성서의 배경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글입니다.

  5. ,예수님 이후 부터는 십에일조 보다 책임이 훨신 무겁다고 보는데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 하려면 남아나는게 있겠읍니까??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기 보다 더어렵다고 하셨지요.
    특히 믿음의 형제들은 갖은겄 서로 나누어 가며살라 하셨는데 그러지 못한 교회에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며
    예배드리는지 아리송 합니다.

  6. 성전훼파 이후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드린 기록이 없다거나 초대교회는 십일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확인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떤 논리입니까? 그런 과거의 역사적 전통이나 사실 때문에 지금도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과거 유대인들의 행한 전통 위에 십일조 드림의 원리를 새우자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 해야하기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절기를 명령하신대로 지키지 않다가 히스기야왕 때에야 비로소 지켰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지요 그렇다고 과거에 유월절을 안 지켰으니 우리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성도가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오늘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혹시, ki 님에 글에 대한 대답이시라면, 제가 Ki님의 링크된 글을 읽어보면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단, 제가 유대학을 공부했고, 구약을 전공하고 있는지라, 초대교회의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십일조 무용론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에서 꼭 이부분에 대해서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2. 강동환님의 생각이 옳다면 왜 사도들은 그 올바른 생각을 못했을까요? 사도들은 강동환님보다더 구약에 능통했고 유대 전통에 능통했는데 왜 그런 쉬운 올바른 생각을 못하고 십일조를 받지 않았을까요?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저도 생각해 보죠.

  7.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제사지낼때에 사용됐습니다. 예를들어 양을 20마리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양 2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린것이지요. 양 주인의 머리와 양2마리의 머리위에 제사장이 안수하여 주인의 죄를 양에게 전가한 다음 양을 죽임으로써 양주인은 죄사함을 받게 되는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일조의 예물로 죽으셨기 때문에 율법을 완성함에 따라 구약의 십일조는 더이상 할 필요가 없는것입니다. 신약시대의 헌금은 교회 재정에 필요한 만큼 성도들이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1. 어느 성경구절을 읽으시면서 이렇게 생각하시는지를 말씀해 주시면 임진성님의 글을 읽는 분들께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8. 하나님 나라, 그 나라를 사람의 세상에서 건물(성전) 짓고 거기 공무원에게 세금(십일조,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여러 일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 내는 형태로 믿는 사람들의 세력을 키워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하시는지요. 물론 목회하시는 분들에 대한 존경과 그 분들에 대한 대우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다만,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십일조를 하느냐 않느냐는 의미없는 논쟁이지요. 예수께서는, 교회는 인간이 지어 놓은 건물이 아니라 했지요. 그분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셨지요. 직접 말씀하시고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이미 존재하는 교회를 찾고 그 곳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건물로 지어 둔 교회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것보다, 세상에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볼 수 있도록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길이 됩니다. 이는 전도하는 인간의 말, 십일조 잘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닌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이 됩니다. 태초부터 또 인간이 창조 된 때부터 우리 속에 이미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곳에 있는 성전을 찾고 거기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품에 내가 속해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그 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느껴 보는 것,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속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 외엔. 제가 주제 넘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공허한 소리로 느끼시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그 길목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 죄를 쌓아갈 수록 하나님이 만든 우리 본연의 ‘선함’이 그 ‘죄’를 인지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피하게 만듭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피했듯 우리 본연의 ‘선함’이 하나님을 피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때 아담을 찾으셨 듯,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미 저 같은 필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일이라 믿습니다.

    1. 나중에 제가 쓸 글에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십일조라는 것은 일종의 세금과 같은 역할이 있었다는 주장은 가능하나, 그 세금이 “성전”이라는 건물을 유지하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는 아닙니다. 정작 십일조에 대한 오경의 이야기들은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에 제정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이라는 단편적인 접근보다는 “하나님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나아가는 방법 중에 재산 (경제) 과 관련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좀 더 이해의 깊이가 깊어지라라 믿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9. 읽어보니깐 ki 님의 성전이 없어서 신약에서는 십일조가 없었다 는 말들이 일리가 있는것도같네요.
    그런데 저는 거기에 이런생각이들었어요.
    신약시대에 사도행전 기준으로 하면 성도들이 서로 재산을 팔아서 구제하고 나누어 먹구 살았다는 기사가 있는데, 신약시대부터 십일조 안했으니나도 안해 라고 말하려면 신약시대에 그렇게 자기 재산 오퍼링 했으니 나도 해야되 이런 논리가 생길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십일조가 아니고 자발적 헌금이다 라고 말한다면, 신약시대 초대교회처럼 자발적 헌금도 안하고 하나님과 공동체에 자기 자신의 재산과 삶을 드리지도 않을 사람이 신약시대의 초대교회를 들어 십일조에대해서 언급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말할수 있비 않을까요?

  10. 현재의 십일조는 ‘의무가 아닌 정신’이다.라는 말로정리됩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닐런지요..

    그에 따라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요구적^^, 무조건적이아닌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행하고 있으며 다른 방편으로도 나눌것을 적지만 실천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따라,
    한편으로는 다만,
    십의 일이란 하나님이 구약의 좋은 비율에 힌트^^삼아..

  11. 십일조는 주일성수와 성례전과 함께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내는걸 강요구하는 것은 자칫 율법의 행위를 강요하는 것일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합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기꺼이 마땅히 십의 일이든 십의 삼이든 전부를 내어 드릴수 있습니다. 십일조 내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 내지 마십쇼. 십일조든 십의삼조든 기꺼이 기쁨으로 더 드리시길 바랍니다.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의삼, 그 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이시대에 헌금은 넘쳐납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헌금을 많이낸다고 하나님께서 좋아 하십니까?
      물론 그헌금으로 바른 구제가 이루어지고 진짜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가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런지요 지금의 한국교회는 님의 말씀처럼 십의 일조와 십의이조 삼조를 강조하다가 물질에 타락하는 교회또한 넘쳐 나는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은혜 받으면 받는대로 자연스럽게 봉사가 되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 되는겁니다 이조와 삼조는 지금의 우리나라만큼은 아닌것 같군요

      1. 진심어린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1. 이시대에 헌금은 넘쳐납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헌금을 많이낸다고 하나님께서 좋아 하십니까?
        저는 솔직히 “이시대에 헌금이 넘쳐난다”라는 말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비판을 할 때에 흔히들 하는 한가지 실수는 머리 속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잆는 윤택한 교회들을 상정해 놓고서 비판합니다. 그러나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 과연 “필요이상으로” 헌금이 넘쳐나서 큰 문제가 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아요.
        또한 “넘쳐난다”함은 “필요이상으로 많은 과잉”의 상태를 이야기하는데, 어떤 항목에서 얼마나 규모있고, 의미있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사실 헌금은 늘 부족한 것이 맞습니다. 단지, 글을 쓰신 님께서 그렇게 표현하신 것은, 아마도 (1)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곳에 또는 (2) 교회가 꼭 사용할 곳에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적이라라 생각됩니다.

        2. 물론 그헌금으로 바른 구제가 이루어지고 진짜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가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런지요.
        맞습니다. 문제는 현대의 교회가 교회의 유지를 위한 재정의 사용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닐까 저도 생각합니다. 교회가 본질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 타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십의 일이냐, 이냐하는 정확한 수치의 문제는 하나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기에 헌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갖게되는 주님께 드려야하는 내 감사와 헌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의 일/ 십의 이/ 십의 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제가 쓴 글은 “십일조 무용론”을 말하는 이들에게 구약성서에서 십일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12.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1. 율법주의적 구원관과 믿음의 행실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십일조를 행하지 말라고 하신 적 없습니다 도리어 행하라고 하셨지요 더불어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긍휼까지 행할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율법주의적 구원관의 잘못된 이해는 모든 율법의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이며 하지 말아야 될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초대교회 때 십일조를 드린 흔적을 역사적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서 십일조를 안 드려도 된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건지 궁금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1. 마23장의 말씀은 마5장 말씀에 비추어 더 확실히 이해되어 집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같은 마태복음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도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지요 그런데 이 완전함이라는 것은 어떤 행위를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19절 말씀에 더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행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십의 일조를 드릴만한 믿음이 있어도 의미와 마음만 가지면 다 된 것이다 라는 논리는 굉장히 비성경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도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할지 몰라도 십일조의 명확성에 대해서 이런 반응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따름입니다

    1. 가끔씩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구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질문들이 매우 장황하고, 논리적이지 않아서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가. 이 질문은 매우 간단한 문장이고,
      나. 여러 명이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서, “바울”과 “십일조”에 대해서 공부하는 연구모임이 있거나,
      다. 일부 단체에서 “십일조”에 대한 긍정적이지 않은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예로 바울과 십일조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근거해서 간단하게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합니다.
      “바울이 왜 십일조에 대해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지는
      (1) 바울의 편지들이 기록되어 있는 신약 성경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2) 바울이 십일조를 왜 굳이 콕 찝어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간적접인 증거구절이 없으므로,
      알수 없습니다.”
      이 이외의 대답은 아마도 “신약성경”에 근거한 대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신앙적인 대답일 확률이 높을 것같아요.

      하지만, “바울은 왜 십일조에 대해서 아무 말을 안했을까요?”라는 질문에 앞서 이런 질문을 꼭 한번 스스로에게 해보세요.
      1.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셨나요?
      2.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십일조를 드려야한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드리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했을까요?
      3.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드려야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의 종교”인가요? 아니면 “바울의 종교”인가요?
      4.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셨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5. 바울이 십계명을 지키라고 했나요? 바울이 십계명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 열개의 명령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건가요?

  13. 소중한 글
    그리고 많은 의견의 댓글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십일조와 구원의 관계를 논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글을 읽고 그분 참 용감하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에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인데… 신약에 예수님이 언급안하셨다고 안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는 어떤 논리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가르치는 구원파에 가까운 신앙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의미하는데 충성의 삶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삶이고 하나님의 말씀 언약의 말씀이 결코 짐이 되지 않는 삶이고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삶입니다.

    신약에서는 위엣 분이 언급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십일조가 아닌 십일조 이상을 말씀하고 계심임을 기독신자라면 분명히 알아야 할것입니다. 최소한의 십일조도 못하고 있다면 참 크리스챤인지 스스로 한번더 진진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고 조언해 드리고 싶습니다.

    십일조 하기 싫으시고 부담되시면 안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분명하게 십일조 이상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구원은 우리가 결정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부분임을 아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 겸손하고 말씀앞에 더욱 경외함을 가져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4. 저도 이 부분은 참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레위인의 역할은 모든 성도를 대신하는 것이지, 그들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우주적 교회를 대신했던 제사장적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들만 특별한 민족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왕같은 제사장임을 기억한다면,
    십일조를 구약 공동체적인 지침에 의거해서 적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구약을 입맛에 맞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모든 소유가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소유의 십분의 일을 공동체를 위한 일에 먼저 떼어놓는 것을 제안하셨고, (우리가 국가 공동체를 위한 세금을 내듯이)
    그 공동체를 위한 일은 종교적 기관을 위한 일과 공동체 구제 사역에 적용되는 것으로 봅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에 사역자의 삶을 돕는 일도 들어가겠지요.
    만약 구약 시대에 오늘날의 복지와 민주주의적인 기반이 있었다면 표현 방식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다른 종교 사제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제물을 취했다면,
    유대교는 오늘날 세금과 같은 시스템으로 종교지도자들을 보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적용을 한다면,
    십일조가 구약에 써 있다라는 것만으로 강조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우리가 유월절 양을 잡지 않고, 소제와 번제를 드리지 않는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신 우리가 구약에서 예배와 속죄, 그리고 구원의 본질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재정에 대한 부분도, 결국 그 사회와 역사적 맥락에서 공동체와 복지에 대한, 종교적 제원에 대한
    하나님의 제안을 이해하고, 그 원리를 바탕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1. 좋은 답글 감사합니다. 제 서버에 관리자 로그인에 몇가지 문제가 있어서 이제서야 답글을 남깁니다.
      이현충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십일조가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 만으로는 당연히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만, 그 십일조가 가지는 신앙적인 의미가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에 의미가 있는가하는 문제는 서로 논의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흔히들 “성경대로”를 말하는 사람들의 한계는 그렇다고 그들이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에 문제가 있고,
      신약 이후 성령의 시대에 살아가는 이들이 구약적인 율법의 필요없음을 말하는 이들의 한게는 율법에서 제정한 법률의 정신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은 꼭 거쳐야할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토론에 율법의 기본정신이 배제되어 있거나, 아전인수식 성경 해석이 난무하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제 글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기본 정신을 설명하고, 그 정신이 오늘날에도 올바른 방식으로 여전히 지켜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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