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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예수님을 몰라보다니요! 잠시 스쳐지나갔던 거리의 행인이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내가 응원한 팀이 지고나서는 응원했던 이들은 허탈하게 집에 돌아갑니다. 그리고 “나는 원래 스포츠에 일희일비하는 소견 좁은 사람이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요. 그리고 며칠 뒤에는 머릿 속에서 패배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아니, 아예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거지요. 

예수님을 싸고 있었던 세마포는 보았으나, 부활한 예수님을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던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겁니다. 믿기지 않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나는 원래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예수에 목매어 살던 사람도 아니고…”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괜히 예수라는 사람에게 얽혀서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튈까봐 모른 척하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은 불과 며칠 만에 예수님을 까맣게 잊어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예수님을 따르는 몇몇 열렬한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했지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도마는 부활의 소식 앞에서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겠노라고 공연히 말했습니다 (요 20:24-29). 

도마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또 한 무리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지요 (그 중의 한 명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합니다 (18절)). 엠마오로 가는 그들에게 한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어요. “낯선 사람”이라고 제가 표현하기는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절대로 낯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존경하는 선생님(랍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예수님을 몰라보다니요!

엠마오의 교회 터에 걸터 앉아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부활 하신 예수님을 상상하고 있다보니, 예수님이 참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토록 그 분의 “주님” 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가르치고, 삶으로 보여주었지만, 감히 “제자”라고 불리던 자들이 하는 말이라는 것이 “나사렛 예수는 말과 일에 능했던 선지자” (19절) 였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도 아니고,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구약 시대에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선지자”와 같은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겨왔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던들 그 분이 불과 사흘 전에 돌아가셨던 “그 분, 예수님”이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 수 있었을까요? 그저 달변이어서 율법학자와 서기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절대로 지지 않고, 성경을 기가 막히게 설명하고, 기적도 행하는 “유다 땅의 유명 인사”로 예수님을 이해했고, 그런 예수님과 남들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다닌다는 것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는가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을리가 만무합니다. 

자신들이 바랬던 예수님의 상(21절)은 있었지만, 예수님이 바라셨던 믿음과 신앙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들의 무지함을 보면서, 저도 참 부끄럽습니다. “과연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만한 믿음을 가진 이가 바로 “나” 인가?”하는 질문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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