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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을 위하여” למען שמו [시편 23편]

Keck, Elizabeth. “The Glory of YAHWEH, Name Theology, and Ezekiel’s Understanding of divine Presence.” Ph.D diss., Boston College, 2011.

Satcher, Mikel E. “”For the Sake of my holy Name”: The divine Repuration in Ezekiel as Literary Phenomenon.” Ph.D. diss., Boston University, 2002.

 

성경에는 “내 이름을 위하여” למען שמי, “그의 이름을 위하여” למען שמו,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למען שמך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왕상 8:41; 사 48:9; 66:5; 렘 14:7,21; 겔 20:9,14,22,44; 시 23:3; 25:11; 31:3; 79:9; 106:8; 109:21; 143:11; 대하 6:32). 이 모든 표현은 전부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למען לשם יהוה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매우 익숙한 어투이면서도 매우 추상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들께서 강단에서 매우 자유롭게 이 부분을 해석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번 시편 23편의 주제를 찾는 방법에 대해서 양식비평(히브리어 운율과 리듬)적인 접근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시편 23편을 노래하는 사람이 강조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표현을 해석하는 학자들의 몇가지의 견해들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명성 Divine Refutation 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고 

 

고대 서아시아 제국들에서는 전쟁을 단지 전쟁으로만 보지 않고 ‘신들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한 나라가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신이 다른 나라의 신에게 패배하였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는 그에 해당하는 신들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천둥번개의 신 바알, 대지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인 아세라는 가나안의 대표적인 신들입니다. 그래서 문화사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학자들은 이 표현이 다른 신들과 그 신들을 섬기는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어구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23편은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곤란한 길을 걸어가며 원수들로부터 고난 받으면, 사람들이 ‘에이~ 뭐 하나님이 저래?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제대로 보호해 주시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도 별거 아니구만!’하는 비아냥 거림을 듣지 않으시려고 비록 보잘 것 없지만 나같은 사람을 위하여 초장으로 인도해 주시고 상을 차려주시고 좋은 것을 주신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은 매우 간결하고 쉽게 למען לשם יהוה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이런 신화적인 설명이 모든 성경 구절을 이해하는 공통분모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의 평판에 흔들리는 소심한 분은 아니시니 말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을 뿐 더러, 동시에 그것을, 또는 그것과는 별개의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사장 신학(P)의 영향을 받은 성결법전 (H) 과 신명기 신학 (D) 에서는 어떻게 이해하는 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위하여-신명기 역사가의 신학 

 

신명기 역사가들 Dtr 은 하나님의 이름 שם을 말할 때에 항상 성전과 연관을 시킵니다. 왜냐하면, Dtr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셔두기 위해서 선택된 장소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헷갈리지 마셔야하는 것은 Dtr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러니, 예배는 어디에서나 드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시는 유일한 곳은 예루살렘의 성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전으로 와야만 했습니다(성지순례의 시초라고나 할까요). 이와같은 Dtr의 신학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신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다는 말은 곧, 예루살렘과 성전을 위한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시편 23편은 Dtr 신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맞아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성결법전의 신학  

 

성결법전 (H)이라고 불려지는 책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언서는 에스겔입니다. 그래서 맨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표현들이 사용된 예들에 에스겔이 등장합니다. P와 H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항상 영광 כבוד이라는 말과 연결지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는 성막(성전)입니다. P의 신학에서는 좁은 의미의 성막을 말하지만, H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 어디나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H는 장소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해진 곳 (Dtr의 신학처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신학 (Omni-presence)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P와 H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시편 23편은 이 모든 구원과 복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P와 H식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느 곳이나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시편의 저자의 의도를 위에서 말한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그 분께 특별히 한 것은 하나도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지대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내게 주신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내가 어디에 있던지 간에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일을 자랑할 이유가 없다.” 이 정도면 어떨까합니다. 그리고 למען שם ליהו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가 가지는 신학을 이렇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우심과 은혜 아래에서 내 것을 자랑할 것이 없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런 신학적인 바탕 안에서 목사님들께서 상황에 맞게 적용하시면 가장 시편 23편의 저자의 의도를 따라서 이해하시는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편 23편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해 주실 것은 이것은 단지 양식비평에 근거한 성서해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였다고 잘못 이해하시거나 해석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마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도 이렇게 설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런 학문적인 뒷바침이 있는 것이라는 것일 알게 되신다면, 더 자신이 있지 않으실까요? 그냥 제 잡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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