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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 13년 9월] 차이를 가로지른 열심당원 시몬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은 이스라엘에서 네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던 해입니다. 독립전쟁, 수에즈 운하 전쟁, 육일 전쟁,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 이름 지어진 전쟁들 가운데, 이스라엘에 가장 고전을 면치 못했던 전쟁은 1973년에 일어난 욤 키푸르 전쟁입니다(10월 6-25일). 흔히들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이 주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מוסד)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몇달 전부터 심상치 않은 첩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가능성을 제기했었습니다. 하지만, 육일전쟁에서의 승리에 도취한 육일전쟁의 영웅이자 속죄일 전쟁 당시의 이스라엘 국방장관 모세 다얀(משה דיין)이 이런 첩보들을 무시한 것이 화근이 되었지요. 육일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집트는 시내 반도로, 시리아는 골란고원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속수 무책으로 일주일 넘게 계속 밀리기만 했습니다. 전쟁이 시작하고 열흘가까이 되어서야 이스라엘이 다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결국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101km,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다메섹)의 40km 까지 진격하여서 아랍 연합군의 항복으로 전쟁이 종료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지만, 이미 예견되었던 전쟁에 제대로된 방비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국민들이 비판하였고, 8년동안 국방장관을 역임한 모세 다얀과 당시 수상 골다 메이르(גולדה מאיר)가 퇴진합니다. 새로 취임한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שמעון פרס)는 이스라엘 군대 내에 이프카 미스타브라(איפכא מסתברא)라는 조직을 만들게 됩니다. 이 조직이 하는 일은 첩보를 통해서 분석된 정보에 반대하는 일입니다. 정반대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만들어서 두개의 의견을 통합시켜 만약의 사태에 대해서 대비하고 입수된 정보를 보다 주도 면밀하게 분석하고자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에 익숙한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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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시몬(Simon the Zealot)은 가룟 유다와 마찬가지로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라틴어 성경(Vg)에서는 가나안 사람 시몬(Simon Cananeus)으로 번역하였고, 우리말 성경 마태복음 10장 4절에서는 시몬은 가나나인으로 소개합니다. 시몬에 대한 조금 다른 번역들은 발음이 비슷한 Καναναῖος(열심당원)Χαναναία(가나안 사람)를 서로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열심당원을 가리키는 말로 Καναναῖος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마 10:4; 막 3:18). 그러니까 시몬을 열심당원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눅 6:15; 행 1:13).

일반적으로 열심당원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로마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심당원이라고 불리는 젤롯(Zealot)은 기원후 1세기 로마에 대항해서 무력으로 유대 땅에서 로마 사람들을 몰아내고 유대인의 독립국가를 세우는 목표를 가졌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젤롯을 유대 고대사에서 사두개, 바리새, 에세네와 함께 네 종파 중의 하나로 기록하였지만, 현대에는 이들이 하나의 종파였다기 보다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반로마 항쟁을 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이해합니다. 젤롯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활동하던 주된 지역은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특별히 갈릴리 호수 북동쪽의 가믈라(גמלא)는 젤롯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니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셨던 예수님과 열심당원들 사이의 만남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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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시몬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시몬의 역할은 매우 미미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님의 형제였다는 것입니다(마 13:55; 막 6:3). 야고보와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형제인지, 아니면 사촌관계의 형제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족에서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가 되었다는 것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뿐 더러, 둘 간의 생각이 대단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예수님은 차이를 인정했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모든 사도들의 직업과 성향을 알 수는 없지만,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 이였습니다. 세상과는 분리된 공동체의 정신을 이어 받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요 1:35-42). 반면에 가룟 유다나, 시몬은 매우 정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둘은 열심당원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도무지 예수님과는 어울릴 것같지 않은 세금 징수원 마태도 있었습니다(마 9:9-13). 마태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겠지요. 이들이 가진 배경 때문에 어떤 다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 간에 토론들이 있었고 누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더 으뜸이 되는 제자인가에 대해서 논쟁하였던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막 9:33-37),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 간에 가진 사회적인 성향의 차이 때문에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선(線)이 있었겠다는 추측은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그 선은 서로를 가로지르는 선이 아니라 가도가도 만날 수 없는 평행선(平行線)이었을 것입니다. 시몬이 형제인 예수님과 이념의 차이로 서로 토론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 발칙한 상상일까 모르겠네요. 어찌되었든 예수님도 제자들 때문에 골치 꽤나 썩으셨을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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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런 열띤 토론 중에서 갈등하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같은 젤롯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시몬은 달랐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소에서 시몬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편에 서있었던 사람은 없었지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시몬이 성령을 경험한 후에는 젤롯의 편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예수님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보면 말도 안되는 이유로 말꼬리를 잡고 조롱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의 배경으로 본다면야 불끈하는 마음에 얼굴이 곧바로 벌개지고 곧바로 논쟁으로 이어지거나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갔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시몬이 성격이 불같고 급하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 시몬은 조금 달랐던 것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이 단지 ‘그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다른 생각들을 귀 기울여 들어주시고 자신(제자)들이 생각하는 길이 아니라, 보다 숭고한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합니다. 시몬은 그것을 배웠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 앞에서 귀막고 들으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자신을 핍박하던 사람들 앞에서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생각해 왔던 길이 아니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예수님과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았지만, 예수님 때문에 그 차이를 가로지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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