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holinesscode@me.com
배가 고파 찾아오는 식탁 – 마르사바

배가 고파 찾아오는 식탁 – 마르사바

이스라엘의 케이블 방송 시청료가 만만치 않아서, 인공위성 방송을 받아보는 작은 안테나를 샀습니다. 운이 좋게, 이 조그마한 접시로 한국의 모 교회에서 방송하는 위성 기독교 방송이 잡히더군요. 그저 한국말로 듣는 방송이 좋아서 아내와 함께 참 좋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식상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문득 방송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 예배는 사라지고 예배를 드리는 방법과 기술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앞 다투어 예배드리는 방법(The Art of Worship)을 개발하고 프로그램이 예배를 넘어서더니만, 이제는 예배마저도 프로그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본말전도(本末顚倒)라고 하나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고 말하고 있는 잠언의 말씀은 정말 명언 중의 명언인 것 같아요. 항상 우연히 멋진 인연을 만들어 내니 말입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거든요. 교회의 네 분 목사님들과 함께 몬타르산으로 떠나려고 집을 6시 10분에 나섰는데, 가야할 길이 막혀 버린 거지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들이 끊어지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종종 있는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길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우회해 보기로 했습니다. 어라! 그런데 멀리 베들레헴 남쪽의 헤로디온이 보이는 거예요. 길을 잘못 든 거지요. 이것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하나봅니다. 계획하지 않았던 마르 사바(마르 사바는 아랍어인데, 그 뜻은 성 사바 St. Saba라는 말로, 성인 “사바”를 기념하는 수도원입니다.)로 발길이 닿아 버렸으니 말이지요.

20_mar_saba_01

 

이스라엘에는 예수님의 발길이 닿았던 곳, 그리고 성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있었던 곳들을 중심으로 많은 기념 교회들과 수도원이 4세기부터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성서와는 관계없는 광야에 수도원이 생길 때에는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루살렘을 둥그렇게 원으로 둘러싸는 모양새로 수도원을 세웠어요. 이것은 광야로부터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는 사탄의 시도를 수도사들이 기도로, 그리고 말씀으로 막아내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오늘 개신교의 기도원을 연상케 하는 수도원이라는 곳의 이미지라는 것이 속세를 떠나서, 개인의 신앙적인 수양을 위해서 철저하게 금욕하는 것, 그리고 왠지 나무 한그루 뿌리라도 뽑으며 기도해야하는 곳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금욕적인 수양의 목적이 개인적인 신앙의 성숙이 아니라, “내가 아닌 예루살렘을 위한 중보기도가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오늘의 신앙인들 중에 얼마가 수도원을 찾을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세워진 수도원들 중에 그나마 쉽게 찾아 갈 수 있는 수도원들을 말하라고 하면, 성 조지(St. George) 수도원, 성 테오도시우스(St. Theodosius) 수도원, 그리고 마르 사바를 들 수가 있지요. 특히나 깎아 지르는 절벽에 세워진 성 조지 수도원과 마르 사바 수도원은 제가 가 본 수도원 중에 가장 장엄하고 저를 초라하게 만드는 수도원들입니다.

20_mar_saba_02

 

마르 사바로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밀을 수확하고 있는 한 가족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광야에서 밀을 수확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유대인 지역의 밀밭에서는 사람 볼 일이 거의 없거든요. 모든 것이 기계로 이루어지는 농업이기에, 정작 제가 지나가는 낮 시간 때에는 사람의 모습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아요. 팔레스타인 지역이랴 두말할 것이 없지요. 들어오기조차 힘들고, 모처럼 마음 먹고 밀을 수확하는 때에 일부러 맞추어 출발하지 않는다면이야 어디 볼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횡재한 거지요. 무작정 차를 세워 사진을 찍었는데 찍히는 사람도 즐거워하고, 찍는 우리도 즐거워했던 참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었습니다. 뒤에 보이는 고철덩어리들로 만든 담과 허술해 보이는 텐트만을 보면서 이 가족의 행복을 가늠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요?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 있겠어요? 언제나 제게 “형”인 형도, “형”이라는 말보다는 “형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 버렸잖아요. 유대 광야도 마찬가지랍니다. 참 많은 것들이 변했어요. 그대로의 사람들이지만, 변화하는 시대를 결국 몸에 담고 만 베두인들은 자기들의 염소나 양을 사진에 담거나 할 때면 꼭 돈을 요구하니 말입니다. 손님 접대하기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호의와 환대를 베푸는 베두인에 대한 환상들이 무참히 깨지는 21세기 유대광야입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돈을 주기 시작하고, 받는 버릇이 들기 시작해서, 저절로 몸에 밴 모습일 테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유대광야에서 참 많은 것들이 변하였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를 말해보라면, 변하였건, 변하지 않았건, 오늘도 여전히 자기 주인인 베두인들을 태우고 다니는 나귀, 그리고 오늘 늘 그 자리에서 지켜야할 양떼들을 바라보는 양치기 개가 아닐까 합니다.

20_mar_saba_03

 

“이곳이 마르 사바의 입구입니다.”라고 알려주는 십자가는 아직도 마르 사바의 입구에서 1,500여 년간 한결같이 수도원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지금이야 차들도 갈 수 있는 길이 뚫렸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광야 길을 걷던 순례자가 광야의 한가운데에서 처음으로 높은 타워와 그 위의 십자가를 만났을 때의 기쁨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이니 십자가가 사람들의 목에서 달랑거리는 장식품이나, 사치품 정도로 가치가 하락했지, 광야를 걷던 천 몇 백 년 전의 순례자들에게 십자가는 흔해 빠진 기념품이나, 보석상 진열대에 처박혀 버린(이제는 팔리지도 않는 식상한 디자인이 되어버린) 장신구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의 십자가는 참 불쌍한 십자가인 것 같아요. 보석상에서도 별로 인기 품목이 아닌 구식 디자인의 천덕꾸러기 정도 밖에 취급되지 않으니 말이지요. 보석상 주인이야 예쁘지도 않는 것 그냥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나마 그것을 찾는 기독교인들이 몇 있기에 한쪽 귀퉁이를 아직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형. 솔직히 말해서 교회에서라고 십자가에 대한 대우가 별반 다르겠습니까? 교회에서조차 강단 앞의 화려한 장식의 보조도구가 되어 버린 지 오래 아닙니까? 오히려 자그마한 교회 빨간 커튼을 뒤로하고 단출하게 서 있는 그 작은 십자가만 못한 불쌍한 십자가들이 “모던”(modern)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제는 인테리어가 되어 버린 요즈음의 교회를 보면, 억울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20_mar_saba_04

 

5세기 후반(478년) 성 유티미우스(St. Euthymius)라는 사람의 제자 사바(Saba)가 유대 광야로 들어오면서부터 수도원 마르 사바의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이 사람은 기드론 시냇가의 동쪽 절벽 어느 꼭대기에 있는 작은 굴에 자기의 거처를 만들고 수도 생활을 시작합니다. 오 년간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하던 이 사람의 이름이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그를 따르려는 사람과 이 사람처럼 살기 원하는 사람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마르 사바의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자연적으로 수도원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공동체를 위한 거처와 예배당, 그리고 공동 기도실들이 만들어지면서, 수도원이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꼭 이런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싶어요. 아직 단독으로 목회를 해 본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2004년 기준) 제가 교회가 어떻다는 것을 말하는 것조차가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께 누를 끼치는 일일수도 있겠지만, 자발적 신앙의 결단! 억지로 퍼 먹이는 밥이 아니라, 스스로 배고픔을 느껴 찾아오게 하는 식탁이 교회가 아닐까 합니다.

483년에 건설되기 시작해서 486년에 공사를 마친 이 수도원의 이름은 성 사바(St. Saba)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이 절벽에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한 최초의 수도자이며, 15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수도자들을 맞아들이고 있는 이 거룩한 수도원 창시자인 성 사바. 수도원의 공사가 계속되고 마칠 당시에는 70명의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교회는 교회건축이 시작되면 교인들이 줄어드는 것이 정석인데, 1명으로 시작한 수도생활에, 수도원 건축을 위한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9년 만에 70명의 자발적인 수도사들이 모여들었으니,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흥”이 아닐까요.

20_mar_saba_05

 

처음 계획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하나님이 발걸음을 인도하셨지만, 아마 하나님이 이곳 마르 사바로 보내주신 숨은 뜻은, 진정한 교회와 진정한 부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형, 형과 제 가슴 속에 있는 교회에 부흥의 불씨를 당겨 볼까요?

 

배가 고파 찾아오는 식탁 E-Book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