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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 Pilate Stone

본디오 빌라도 Pilate Stone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는 로마의 속주의 하나인 유대아(Judea) 지방의 다섯번째 행정장관(Praefectus Iudaea)이었습니다(기원후 26년-36/37년). 빌라도는 유대아 뿐만이 아니라, 유대아 남쪽의 이두매아(Idumaea) 지역과 유대아의 북쪽인 사마리아 까지 모두를 관리했습니다. 당시 이 지역들을 통틀어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던 도시가 두 개 있었는데, 예루살렘은 전통적으로 유대아 사람들의 수도이자 이두메아 지역과 갈릴리 지역에 이르는 유대교의 종교적인 중심지 였습니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그들의 성전이 있었지만, 당시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왕이 거주하던 곳이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의 영향력이나 중요성은 예루살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중심지는 지중해 변에 있는 가이사랴(Caesarea Maritima)였습니다. 이 곳은 로마가 파견한 총독의 거주지이자 동시에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던 중심지 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가이사랴에 거주하면서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유대인들의 동향을 파악했습니다.

빌라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로마의 기록에는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위대(Praetorian Guard)의 고위 장교였던 세야누(Sejanus)의 천거로 유대아의 행정 장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야누스가 31CE에 몰락하고 처형당하면서 빌라도의 정치적인 인생에 큰 위기가 닥쳐옵니다. 역사가들 중에서 일부는 아마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더 열정적인 충성심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 아닌지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연대기(Annals 15.44)에서 그리스도(Christus)가 티베리아스 황제 시절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했다는 짧막한 기사를 소개합니다만, 이런 기록만으로는 빌라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로 빌라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명쾌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빌라도와 연관된 사건은 (1)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빌라도에게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고 했다는 것을 구실 삼아 재판을 걸었다(마 27:1-2,11; 막 15:1-5; 눅 23:1-2; 요 18:28,33-37). (2) 예수님이 죄없음을 알게 되어서 공정한 재판관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마 27:18; 막 15:10,14; 눅 23:13-16; 요 18:38; 19:4). (3) 유대인들에게 바라바와 예수님 사이에 누굴 선택할지 물었다(마 27:15-26; 막 15:6-15; 눅 23:18-25; 요 18:39-40). (4) 빌라도가 손을 씻고는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자신은 무죄하다고 선언했다(마 27:24)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보다 빌라도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요한복음에는 빌라도의 다른 행적들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며 묻기도 했고, 예수님께서 마치 왕처럼 자색 옷을 입고 유다 사람들 사이로 끌려 나올 때,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라며 유대인들의 기소가 터무니 없음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성경의 기록은 빌라도가 그리 특별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괜찮은 사람인데 유대인들이 문제였고, 예수님을 죽게한 책임을 빌라도가 아닌 유대인들에게 모두 돌리려는 듯한 뉘앙스도 은연중에 내비칩니다.

그러나 빌라도와 같은 시대 사람인 필로(Philo 10BCE-45CE/50CE?)가 평가하는 빌라도는 신약 성경, 특별히 요한복음의 빌라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필로는 예루살렘에서 대략 560km 떨어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였고, 헬라 문화와 학문에 능통하고 유대교에도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성경을 헬라식으로 증언하는데에도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입니다. 필로의 동생 리시마쿠스(Alexander Lysimachus)는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정치적인 지도자였으니, 필로의 집안이 사실상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이끄는 정신적-사회적 리더였다고 말할 만 합니다. 이런 사회적인 지위 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로마 제국과 필로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필로의 동생 리시마쿠스는 티베리우스 황제(14-37CE 재위)의 어머니의 경제 자문 역할을 했었고, 리시마쿠스의 아들인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는 티투스(Titus)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성을 함락할 때(70CE) 예루살렘 공격에 함께 참전하기도 했거든요.

그러므로 필로는 로마와 유대인의 경계선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필로는 조금더 객관적으로 로마 사람 빌라도를 평가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필로의 글에서는 빌라도를 매우 박하게 평가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와 유대인의 대표로 칼리굴라 황제(37-41CE 재위)에게로 간 필로는 유대아의 왕 아그립바 왕의 편지를 대신 전하노라며 다음과 같은 형용사들로 빌라도를 묘사합니다. “그는 융통성이 없이 완고합니다.” “그는 고집이 셉니다.” “그는 잔인합니다.” 그는 “심술궂습니다.” “그는 성이 나있습니다.” 그리고 행정장관으로서의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이런 명사들로 정의합니다. “뇌물을 즐김”, “폭력적임”, “강탈”, “협박”, “독설을 내뱉음”, “재판을 받지 않은 죄수들을 처형”. “포악한 야만성”.

빌라도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지만, 가이사랴에 거주하였던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된 역사적인 기록물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도 발굴이 되었거든요. 1961년 가이사랴를 발굴하던 이탈리아 고고학자 프로바(Antonio Frova)가 극장을 발굴하던 중 무대를 오르내리던 계단에 라틴어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서 확인해보니, 본디오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새겨 놓은 석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가 무너진 뒤 기원후 4세기에 다시 도시를 재건하면서 극장의 무대를 오르내리던 계단으로 재사용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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