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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의 저자

본 정리는 왕대일 박사의 “신명기연구”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각주가 없는 한, 모든 내용은 왕대일의 강의 내용임을 밝히며, 강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한 설명과 이해는 각주에서 그 출처를 밝힌다. 특별히 출처를 밝히지 않은 학술적인 논거는 본 강의의 주교재인 “다시 읽는 토라”에서 기인한 것임을 밝힌다.

신명기의 저자

전통적으로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과 성서본문의 비평적인 연구의 결과는 신명기를 포함한 오경을 모세가 기록하였다는 입장은 받아들일 수가 없게한다. 신명기 안에서의 문체의 변화와 신학의 변화들은 Deuteronomists라는 신명기 저자의 가설을 만들어내었다. 그럼 현재의 신명기 본문이 있게한 Deuteronomists는 누구인가? 왕하 22:3-30에서 알 수 있는 단서는 요시아의 개혁의 불씨가 되었던 율법책의 발견과 관련된 사람들, 요시아, 힐기야, 사반을 비롯하여서 개혁을 지지하고 수행했던 사람들, 아히감, 악볼, 아사야 모두가 예루살렘 궁중의 고위관리였다는 것이고, 이러한 성서상의 배경은 예루살렘 궁중의 고위관리에 의해서 신명기가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개혁의 주체가 고위관리이므로, 신명기의 개혁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신명기를 기록한 저자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세가지의 견해가 있다.

레위 제사장계열 (Von Rad-Levitical priestly circles)

왕대일은 왕하 22장에서 1. 요시아의 시대에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요시아의 시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책을 발견했다는 점, 2. 누군가에 의해서 그 책이 보관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율법책을 보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계층으로 레위 제사장 계층을 지목하였다. 뿐만아니라, 왕대일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의 내용이 요시아를 비롯한 힐기야와 사반에게 낯선 내용이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율법책이 발견되어지고 읽혀진 장소는 남쪽 유다왕국의 예루살렘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책은 전적으로 남쪽의 지방색을 가지기 마련이다. 분명히 신명기 안에는 남쪽 유다왕국의 사정과 사회를 반영하는 본문들이 있고, 이 문화와 사회속에서 사는 유다인들이 그 율법에 친숙하리라는 가정은 당연하다. 그러나, 왕하 22:13-14에서는 이 율법책이 유다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진정성과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예언자 훌다에게 물어보았다고 전한다. 왕대일은 유다인들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세가지 예를 제시한다:

  1. 신명기의 내용에 다윗왕조에 대한 호의적인 내용들이 없다.
  2. 왕정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3.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없다.

결론적으로 왕대일은 신명기를 기록한 신명기 사가는 북쪽에서 내려온 레위사람들이며,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은 이들이 가지고온 북쪽 전통의 율법이다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왕대일의 견해에서 재고해 볼 것이 있다. 훌다가 어떻게 북쪽에서 내려온 율법을 알고 있었는가하는 문제이다. 성서에서는 훌다의 가계와 거주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있으나, 훌다가 북쪽에서 이주해온 예언자인지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북쪽전통의 진정성과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훌다를 찾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언자 그룹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훌다를 찾았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왕대일의 견해는 전통적인 폰라드 Gerhard Von Rad의 견해와 비슷하다. 폰라드는 이 신성한 전통을 보존하라 수 있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이며, 더우기 이 율법책을 해석하고 유다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지키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계층으로는 레위 제사장들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폰라드의 견해는 신명기가 단지 유다의 사람들에게 공포되어지는 율법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는 책이면서 동시에 모세의 전통에 기대어 유다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설교라는 입장에서 출발한 추론이다. 그러나, 폰라드의 견해는 주전 6세기의 에스라를 모델로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 율법 תורה 가르칠 수 있는 פרשׁ 위치의 사람은 에스라였고, 그는 제사장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언서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פרש 것과 “읽는” קרא 것 사이에 의미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제사장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에스겔의 예를 들 수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는 상징적인 행위는 율법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하라는 말만 하겠다는 예언자의 상징이며, 여기에서 예언자의 역할은 율법의 단순한 낭독자가 아니라, 고발자이자 해석자이다. 또한 에스라는 제사장 כהנא이면서, 동시에 서기관 ספר דתא 이었다(스 7:21).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인지, 아니면 서기관의 역할인지 이 둘간의 역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폰라드는 이 둘간의 역할의 차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예언자 그룹 (Nicholson-Prophetic circles)

왕대일은 예언자 그룹이 신명기의 저자라는 견해를 밝힌 학자로 니콜슨 Ernest W. Nicholson을 말한다. 니콜슨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신명기가 유다의 전통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1. 인보동맹 Amphictyony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2. 계약법 준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3. 거룩한 전쟁 Holy War이라는 사상이 있다.
  4.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왕정에는 비판적이다.

남쪽 왕국의 예루살렘 전승은 신적인 대리자로서 왕을 이야기하는데, 신명기 17:14-20의 이야기는 왕정에 대한 북이스라엘 예언자집단의 적대적 태도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니콜슨의 주장에 덧붙여서 밀러 Patrick D. Miller는: 1. יהוה를 시종일관 유일한 신으로 말하는 점, 2.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 3. 배교의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점 을 덧붙여서 신명기가 예언자들과 관련있다는 니콜슨의 견해를 설명한다. 더군다나 왕대일에 제시한 대로 모세를 예언자로 부르고, 예언자를 신명기에서 중요한 집단으로 부각시키는 신명기 18:15-20의 본문은 신명기가 예언자 그룹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뒷바침해주는 또 다른 본문이 될 수 있다. 왕대일은 니콜슨의 견해에 덧붙여 요시아의 시대(640-609BCE)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던 예언자 예레미야(640-587)가 신명기와 같은 문체를 가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문체뿐 아니라,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아히캄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사람들로부터 예레미야를 보호하였다는 역사적 사건이 신명기와 예레미야와의 밀접한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렘 26:24).

예레미야와 신명기가 문체와 신학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봐인펠트 Moshe Weinfeld 는 이미 그의 책 Deuteronomy and Deuteronomic School 에서 예레미야가 사용했던 신명기적 문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곧 신명기의 저자를 추론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본다. 신명기에서 사용되어진 문체는 당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표현방법과 어투들이었다. 그러므로 동시대에 살고 있었던 예언자 예레미야뿐 아니라, 모든 예언자들이나 일반사람들도 같거나 비슷한 표현방법을 사용했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를 비롯한 예언자 그룹이 신명기의 수집 및 편집에 관여를 한 것인지, 아니면, 예레미야와 및 예언자 그룹이 신명기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고찰이 있어야한다. 뿐만아니라, 예레미야서의 저작에 관해서는 그의 예언활동의 시작을 요시아가 죽던 해 (609BCE)또는, 그 이후 (605BCE)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명기 저자의 문제를 설명할 때에, 예레미야와 함께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니콜슨의 경우도 호세아가 신명기의 저작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이 역시도 호세아서의 편집의 과정에 대한 연구 이후 설득력을 잃었다.

지혜문학과 서기관 그룹 (Weinfeld-Wisdom and scribal circles)

왕대일은 신명기의 저자와 관련하여서 지혜문학과 서기관 그룹이라고 보고 있는 봐인펠트의 견해를 짧게 비판한다. 분명히 신명기의 1-11은 “설교”이긴 하나, 신명기는 뭐라해도 Law의 성격이 강하며, 이것이 지혜문학인 시편, 잠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봐인펠트는 신명기에 나오는 문체와 신학이 지혜문학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주목한다. 그는 תועבת יהוה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오직 신명기와 잠언에서만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것과 이 표현이 아카드의 잠언, 이집트의 아메네모페 Amenemope 의 지혜의 가르침에서 자주 사용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외에도 신명기와 지혜문학과 병렬관계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문학적인 표현들을 아래와 같이 나열한다:

  1.  לא תוסף…לא תגר…ג  더하거나 빼서는 안된다.   신 4:2; 13:1 잠 30:5-6
  2. לא תסיג גבול              경계선을 옮기지 말라.        신 19:14 잠 22:28; 23:10
  3. אבל שלמה                  공정한 추                              신 25:13-16 잠 11:1; 20:10,23

לא תוסף לתגר는 전도서 3:14에서도 같은 신학적인 태도를 찾을 수 있고, 공정한 추에 대한 신명기의 태도는 아메네모페 18.15-19.3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게다가 공정한 추로 사람을 대하지 않은 것이 תועבת יהוה라는 신학은 신명기와 잠언, 그리고 아메네모페 모두가 함께 말하고 있다는 데에서 봐인펠트는 신명기가 지혜문학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외에도 맹세와 서원에 대한 경고(신 23:22-26; 전 5:1-5; 잠 20:25; 12:13; 18:7; 길가메쉬 9:7-9; 하페르 Harper 의 노래 1.193-97), “~하는 것이 낫다” טוב 라는 어투의 사용, 훈계의 내용(신 23:16; 잠 30:10)등 봐인펠트가 제시하는 지혜문학과 신명기의 병렬적인 표현방법들은 이곳저곳에서도 드러난다. 또, 신명기에서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혜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한 것도 봐인펠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신 1:9-18; 4:6).

봐인펠트는 지혜문학 저자들이 신명기 저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문학을 알고 있는 서기관이 신명기의 최종 수집가이자 편집자라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조약들은 고대근동의 조약들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당대에 주변 나라들과의 조약을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옮길 수 있는 계층을 서기관으로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봐인펠트의 입장은 단지 지혜문학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자체가 신명기의 저자로서의 지혜자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봐인펠트는 7세기 중엽에 신명기 구성의 기초가 만들어지고 compose, 6세기 초에 신명기 역사관이 만들어지고, 예레미야에 나타난 신명기적 산문들이 6세기 말에 결합되었다고 말한다. 봐인펠트는 히스기야와 요시아 시대의 서기관에 의해서 신명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비록 신명기 안에 폰라드가 말한대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중요한 인물로, 그리고 중심적인 소재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명기의 최종편집자는 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봐인펠트는 최종 수집한 사람들은 고대 근동의 조약을 익히 알고 있고, 당대의 지혜문학을 꿰뚫고 있으며, 이 신명기로 유다의 백성들을 올바른 행위와 도덕의 기준을 제공하는 지혜를 말하는 계층으로 서기관을 추론한다.

그러나, 봐인펠트 가설의 약점은 서기관 뿐만이 아니라, 8세기의 예언자들 역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전달자 (설교자)의 역할과 함께, 당대 주변 국가들의 상황과 그들의 지혜와 문화에 걸쳐 전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신명기의 지혜문학적인 요소와 근동의 지혜와 조약에 능숙한 집단을 지혜문학에 능통한 서기관들에게만 한정을 짓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서에서도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지혜의 잠언들을 인용하였고 (렘 31:29-30; 겔 18:2),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cursus(1)열왕기하 22-23장과 편집의 역사

열왕기하 22-23장은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고 그것이 시행되기까지의 과정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왕대일은 이 본문을 근거로 신명기의 저자의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왕하 22-23장이 신명기의 저자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 구문이 될 수 있는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열왕기의 저자는 신명기를 기록한 저자가 아니라, 신명기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신학을 소유하고 있는 또 다른 후대의 역사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왕하 22-23장 안에서도 문체의 일치가 나타나지 않아 학자들은 적어도 세개의 층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왕하 22-23에서 저자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왕하 22-23을 최종 편집한 사람(들)의 견해를 묻는 작업이된다.

Excursus(2) Ephraimite

로페는 여호수아 24장부터 삼무엘상 12장까지를 신명기적 역사가 DtrH가 아닌 북쪽 지파의 신학을 가진 Ephraimite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Rofe, Alexander. “Ephraimite Versus Deuteronomistic History.” Pages 221-235 in Storia e tradizioni di Israele. Edited by Paideia: Brescia, 1991). 로페는 수24-삼상12까지의 본문이 서로 다른 문제와 신학사상이 뒤엉켜있는 것을 주목한다. 그는 Ephraimite 전통이 후기 Elohist의 신학사상을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phraimite는 북쪽 왕국말기에 생겨났으며, 북왕국에서 성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의 본문에는 잃어버린 10개 지파의 문화와 종교적인 합법성을 담고있다. 이 Ephraimite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전적으로 북왕국의 이야기들이다. 2. 역사의 영웅들로 여호수아(에브라임), 에훗(베냐민), 드보라(에브라임산지), 바락(납달리), 기드온(므낫세), 입다(길르앗), 삼손(단), 엘리(실로), 사무엘(에브라임)을 말한다. 3. 예루살렘을 거룩한 장소로 말하지 않고 세겜 (수 24:1,25), 남쪽 갈릴리의 오브라 (삿 6:24), 길르앗의 미스바 (삿 11:11), 실로 (삼상 1:7,9), 베냐민의 미스바 (삼상 7:5-9), 라마 (삼상 7:17; 9:5-25), 길갈 (삼상 11:15)을 언급하며, 모두가 북쪽지파에 속해있다. 4. 가장 뛰어난 지파는 Ephraimite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여호수아와 끝을 알리는 사무엘이다. 5. 반왕조적이다. 왕을 세우는 것은 불법적인 행동이다 (삿 9:8-15; 삼상 8;11-18; 10:19a; 12:12-17) 6.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싸움을 걸지 않고, 늘 수동적으로 전쟁을 걸어온 이방 민족과 나라들에 자신들을 보호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움직이는 유목민의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전쟁에서는 늘 하나님이 개입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왕이 아니다. 7. 예언자의 역할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죄를 징계하는 역할을 하거나(삿 6:7-10; 10:11-14; 삼상 10:18-19a), 과거에 하나님이 하셨던 일들을 다시 되새기에 하여서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인도하다 (수 24:1-28; 삼상 11:14-12:25). 8. 율법준수에 대한 의무가 없다. 로페는 Dtr과 Ephraimite의 공통점은 우상숭배를 적대시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길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과 Dtr이 말하지 않는 빈 역사를 Ephraimite가 채워주기 때문에 Dtr의 본문에 Ephraimite의 문서가 끼어들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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