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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정 – 나사렛

예수님의 가정 – 나사렛

여름이 되면, 저마다 가족들이 무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산이나 강, 그리고 바다로 여행을 다녀올 겁니다. 팍팍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매일 똑같은 삶의 쳇바퀴에 변화를 주는 것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데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어디론가 다녀올 수 있다면이야 감사하지만, 팍팍한 일상에서 그런 시간, 그런 여유를 찾을 수 없는 가장이라면 가족들에게 많이 미안해 할겁니다.

대한민국에 수 많은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족도,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도 그런 많은 가족들 중의 하나 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족들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 내 가족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전에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부부싸움을 했을까?” “예수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들께 혼난 적이 있을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두고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것이 좀 불경스러워 보이기는 합니다만, 요셉과 마리아야 지극히 우리와 같은 사람인지라 부부간의 크고 작은 의견의 충돌이나 때로는 다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글쎄요. 그런데요. 성경에 제 상상의 날개를 펴게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farmers

예수님 당시 나사렛은 약 400여명이 살던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나사렛을 재현해 놓은 “나사렛 빌리지”라는 곳에서 성탄절을 맞이하여서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는 소식을 듣고 꼭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막내 딸, 노하를 잃어버린 겁니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으며 짧은 5분여의 시간 동안 별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노하를 찾았는데, 아이는 울고 저도 눈물이 나고, 그리고 나서는 안도와 함께 괜시리 아내에게 화가 나더라구요. 아이고… 아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물론 그렇다고 아내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맹세합니다! 제가 아내에게 화를 낼 정도로 용감하지는 않거든요.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는데, 하룻 길이나 간 다음 아들이 없는 것을 알게된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돌아가서 예수님을 찾는 사흘 동안 정말 별별 생각을 다했을 겁니다. 그런데 성전에 계시던 예수님이 부모님과 다시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노하처럼 울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지 않았습니다.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랍니다. 어휴… 제 아들 같았으면… 뭐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어린 시절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기도 했던 그저 노하와 같은 아이였을 수 있다는 겁니다.

 

carpenter

목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어“테크톤”을 우리말로 “목수”라고 번역하였다. 비록 “목수”로 번역되기는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테크톤”은 나무 만이 아니라, 돌까지도 다듬는 기술자를 뜻한다.

그럼, 예수님의 가정과 우리 가정은 도대체 차이가 무엇일까요? 저는 나사렛의 요셉 교회의 성화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우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런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흐뭇한 모습에서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도종환 시인의 ‘가구’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 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 문을 먼저 열어 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본다
돌아 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대화없는 남편과 아내를 그린 시입니다. 싯귀 중에서 제게 가장 여운이 구절은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입니다. “가족”이라고 말하고 “식구”라고 이야기하지만, 함께 밥상에 다 함께 둘러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 한번 나눌 수 없는 이들을 어떻게 “식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서 야근이다 거래 업체 사람과 저녁을 먹는다 집에 오지 않고, 아이들은 새벽같이 나가서 야간 자율 학습이다 학원이다 집에 한 밤 중에 들어오고, 아내는 나름대로 친구들을 만나고 일을 한다고 집을 비웁니다.  서로 만나서 함께 밥먹을 시간은 커녕, 얼굴 볼 일도 거의 없습니다. 주말이 되면, 아이들은 쉬는 날이라고 공부로부터 해방되어 친구들 만나러 나갑니다. 아버지는 피곤하다고 하루 종일 잠을 잡니다. 그러면 아내는 “이식이”니 “삼식이”니 하면서 면박을 주지요. “식구”라고 하지만, 식탁에서 밥 한번 제대로 같이 먹을 일이 없고, 가족이라고 하지만, 서로 대화가 없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내 가족들은 “가구”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집의 한 구석에서 공간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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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가족. 요셉 교회의 입구에 그려져 있는 예수님 가족의 일상을 그린 성화

예수님 가정의 성화를 보건데, 예수님의 가정은 그런 가정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가난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늘 가족들이 함께 하는 가정, 한 식탁에서 식사하면서 대화하는 식구,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전해준 말을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아내를 위해서,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아이가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가정. 예수님의 가정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이 여름 의무감으로 가는 피서라면, 오히려 다녀와서 더 피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피서”라는 이름으로 어딘가를 다녀오지는 못할 지라도, 정말 가족들이 식구가 되고 예수님의 가정과 같은 가정을 이룬다면, 몇 십번의 피서보다 더 의미있는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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