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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서신]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울며불며 헤매고 있습니다-엔게디

[이스라엘서신]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울며불며 헤매고 있습니다-엔게디

 

강(江)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이지요? 이 시를 영어로 번역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그 번역된 영시를 원문을 모르는 사람이 다시 한글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록된 언어는 번역이 되는 순간, 아무리 멋진 번역자를 만난다손 치더라도 처음 그 글을 기록한 사람의 심상을 100% 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인 것 같아요. 언어에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생각이 담겨 있는데, 이 같은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이 사전식의 번역이 작자의 원래의 의도를 그대로 전하기는 매우 어렵겠지요.

성서 번역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듯합니다. 히브리어 또는 헬라어로 기록된 신구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들과 헬라인들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그 정신의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힘든 번역 가운데에서 역시 최고봉은 “시편”이 아닌가 합니다. 시(詩)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운율대구, 은유상징, 두운각운, 그리고 같은 의미의 단어라고 할지라도 좀 더 그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을 선택하는 것이 ‘‘ 아닙니까! 이런 히브리어 시를 우리말로 옮길 때에, 그 어려움은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히브리어 시에는 음절과 음절이 만들어내는 수(數)의 미학이 있고, 두운각운이 만들어내는 대구병렬이 있고, 한 줄 한 줄 만들어내는 단어의 수의 일치가 있습니다. 시편 강의를 하는 것은 아니니 제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겠으나, 지금의 편지에서는 성서에 몇 번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기에 그 의미가 난해한 단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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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엔게디 עין גדי 는 유대 광야 한 가운데에 쏟아지는 신선한 오아시스가 있는 곳입니다. 국립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의 골짜기로 푸릇푸릇 풀들이 돋아나있고, 그 절벽의 이곳저곳은 사람이 파 놓은 듯, 저절로 생긴 듯, 많은 동굴들이 있어요. 그 동굴들을 잘 보면, 원래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에 사람의 손길을 불어 넣어 주거의 장소로 이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절벽의 동굴에 어떻게 사람이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올라가는 길이 가파른 동굴은 이미 몇 천 년에 걸쳐서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입니다. 엔게디 국립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성서의 사람은 다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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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다윗은 이곳 엔게디까지 도착합니다(삼상 23:29). 다윗이 엔게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울은 3,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엔게디에 오지요. 그 뜨거운 태양을 뚫고 달려온 사울이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신 뒤 잠시 열기를 식힐 휴식의 장소가 필요했을 겁니다. 주위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서 잠시 쉬던 사울의 옷자락을 다윗이 슬며시 베어가지고서는 사울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곳이 바로 이곳 엔게디입니다. 어느 동굴이 다윗이 숨어 있었던 그 동굴이었는지 알 길이야 없지만, 이 수많은 동굴 중에 어느 하나는 바로 다윗이 그날 숨어있었던 동굴이겠지요.

동굴이 산재해 있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물 흘러가는 소리가 졸졸 나기 시작하더니만, 곧 어른 키의 3배 정도 되는 폭포가 떨어집니다. 메마른 유대 광야의 골짜기 한가운데에 옥색의 맑은 폭포를 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산수강산을 유산으로 받은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폭포는 셀 수 없고, 이런 물은 너무나 흔한 물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스라엘에 한 달만 살아보면, 나무와 물과 흙을 대하는 마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메마른 땅을 뚫고 올라온 나무들이 장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풀과 나무들을 담아내는 들이 장하고, 그 땅을 흐르는 물줄기와 하늘의 가 장합니다. 이스라엘에 와서 제가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놀라는 것인데, 이것 역시 이렇게 척박해 보이는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해요.

좀 더 좀 더 위로 위로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그 높이가 50미터 훨씬 넘는 “다윗의 폭포“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의 폭포 앞에 서면 떨어지는 물줄기의 소리에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에요. 이 폭포는 오아시스에서 터져 나오는 샘 줄기가 만들어낸 장관 중의 장관인데, 한국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폭포의 모습을 보기란 그리 쉽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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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면, 광야의 동물들이 물가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가 갔던 날도 비가 온 다음 날이었는데, 질퍽한 땅에, 가젤늑대, 그리고 사반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산재해 있더라고요. 아마 이른 아침에 이미 이곳에 와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돌아갔나 봅니다.

이 폭포 앞에만 서면, 저절로 시편 42편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운 구절을 이렇게 멋대가리 없게 번역한 구절도 드물어요. 굳이 그 의미를 담아서 번역을 한다면, 표준새번역의 번역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시편 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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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단어 아라그 ערג 는 참 난해한 단어입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단어를 설명하면서 몇 가지 의견을 내어 놓는데, 표준새번역에서 말하는 것처럼 ‘헐떡거린다’, ‘찾으면서 울고 있다’, ‘펄쩍 펄쩍 뛰고 있다’ 등이 있습니다. 제가 말해 놓고서도 여기에 적합한 한국말을 찾기가 매우 힘드네요. 하여간에 그 의미는 ‘매~우 간절하게 애태우며 찾는다’는 겁니다.

광야에 사는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다가 지치면, 가만히 그 자리에서 힘을 비축하며 있다가 해가 질 무렵에 자기들의 굴에서 나오는 동물들의 뒤를 따라가면 물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지요. 대부분 광야에 이렇게 물이 있는 곳은 국립공원들이거나, 주위에 베두인의 텐트들이 있으니 일단 “살았다” 할 수 있지요. 이 또한 광야에서 살아가는 법입니다.

그런 사슴이 타는 목마름을 견디어 내며 물이 있는 오아시스에 도착한 겁니다. 물을 마시러요. 그런데 있어야 할 물이 없고 메마른 바닥만이 쩍쩍 갈라져 있는 거예요. 불과 어제만 해도 굉음을 내면서 떨어지는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한낮의 더위를 마치 에어컨 마냥 냉기로 가셔주었는데, 이제 그 폭포는커녕 쩍쩍 갈라진 땅만 사슴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사슴이 난리가 난 거지요. 이 헐떡거리는 사슴이 말라버린 샘 앞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아이고 나 죽었다’를 연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런 사슴을 생각하면서 시편의 시인은 그런 사슴의 처지가 바로 자기의 처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편을 기록한 시인은 매우 곤란한 상태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엔게디에서 이 시편을 묵상하노라면, 또다시 어김없이 다윗이 생각납니다. 사무엘으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어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분명히 승승장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다윗은 사울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광야를 전전하며 숨어 다닙니다. 그런 다윗을 보면서 분명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다윗아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은 너를 버리셨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그 지경에 빠져서 헤어날 길이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할 만도 했을 텐데, 다윗의 삶을 들여다보면 저처럼 신앙이 조건적이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이 시편의 기자 역시 같은 상황을 겪었나 봅니다. 그래서 자기의 처지를 이렇게 비관합니다.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그런데 말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역시 저와 같은 소인배가 아니더라고요. 이 정도가 되면, 아마 저는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셨나요?” “내가 무슨 잘못을 그토록 하였기에 지금 이렇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시나요?”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기는 하시는 건가요?” 이렇게 하나님께 따지듯이 되물었을 텐데,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내 영혼이 너무 낙심하였지만,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님만을 그래도 생각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저 큰 폭포 소리를 따라 깊음은 깊음을 부르며,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저 파도의 물결은 모두가 한 덩이 되어 이 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낮에는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밤에는 찬송으로 나를 채우시니, 나는 다만 살아 계시는 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역시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나요? 요즈음 들어서 이 시편이 제게 매우 힘이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저의 태도는 원망과 하소연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려야 하는 찬양이 아닌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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