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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서신] 엉뚱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팔복교회

[이스라엘서신] 엉뚱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팔복교회

종종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를 손꼽으라면, 기복신앙이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인 것 같습니다. 마치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이 장독대에 맑은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촛불을 켜고 가정의 복을 빌 듯 하나님께 같은 모양으로 복을 비는 우리의 신앙 행태에 대해서 일침을 놓는 말인 것 같아요. 하지만 알고 보면, 저도 그런 기복신앙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오늘의 제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기복신앙이라는 것을 “나쁘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구하는 것”과 “복을 주는 것” 이 두 행위가 미신에 근거한 행태이거나,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축복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그 주체인 양 말한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 가정과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나쁜 건가요? 아마 매일 새벽, 새벽기도회에서 어머님이 우리 가족을 위해서 복을 비는 기도를 하시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형과 제가 있었을까요? 뿐만 아닙니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나쁘다면, 설교 강단에서 하나님의 복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설교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목회자들이 전부 다 잘못되었단 말씀인가요? 그런데 가끔 하나님의 복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저도 잘못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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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북쪽에는 완만하게 올라가는 듬직한 푸른 언덕이 있습니다. 이 푸른 언덕은 비가 오는 철이 되면, 푸릇푸릇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과 노란 겨자 꽃들이 만발하지요. 군데군데 빨간 들양귀비 꽃까지 한데 뒤엉키면, 정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언덕이 없답니다. 게다가 오래되어서 죽어 비틀어진 나무 몇 그루에 몇 년 전 바나나 밭을 뒤엎는다고 불을 지른 탓에 함께 타버린 키 큰 가시나무까지 더해지면 그 자체로 멋진 그림이 됩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들풀들을 헤치고 걸어가면, 저절로 찬양이 나와요. 옆에 누가 있든 없든 간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들에 핀 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아라.” 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바로 그 자리에 제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확 몰려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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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에는 두 가지 의미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중의 한 곳은 호수와 맞닿은 산 아래 자락에 있는 작은 굴인데, 사람들은 이곳을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한 장소(눅 6:12-16) 라고 믿고 있습니다. 굴이라기보다는 산의 움푹 들어간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울 텐데, 열 명 남짓 앉을 만한 좁은 장소예요. 이곳에는 작은 나무 의자가 있고, 예수님을 기억하는 순례자들이 기도를 하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장소는 이 언덕의 정상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팔각형 교회 (Mount of Beatitudes)의 주위에는 빽빽하고 높다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는데, 키 낮은 푸른 풀숲들 가운데에서 장한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것이, 멀리서 보고서도 금방 이곳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합니다. 게다가 교회가 서 있는 정상 부분에서 내려다보는 갈릴리 호수의 경치는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그 장관을 제대로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네요. 신기하게도 사진기를 들고 찾아가는 날은 항상 뿌연 수증기가 제 시야를 가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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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교회 이름이 Mount of Beatitudes 입니다.)는 매우 젊은 교회예요.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세워진 연대가 아주 최근이라는 겁니다. 대부분 이스라엘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3세기 내지는 4세기에 교회가 세워지고, 아무리 늦어도 5세기에는 그 중흥기를 맞이하는데, 이 교회만큼은 1939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의 생김생김도 매우 현대식이지요. 이스라엘의 어느 교회에나 있는 초대교회의 모자이크 바닥도 역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교회가 덜 중요하거나, 별 의미가 없는 곳은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교회를 “팔복교회”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께서 보통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 하더라도 남자 어른만 5,000명을 먹이셨으니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만 한 공공의 장소가 어디 흔했겠냐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한번에 5,000명 정도 모이려면 문화예술회관이니, 무슨 학교의 강당이니 하는 곳을 빌려서 모이는데 그런 시설이 예수님 당시에 어디 흔했겠습니까? 게다가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전하실 때에 산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했는데, 산에 몇 백 명, 몇 천 명이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장소가 있었겠냐는 거지요. 나무가 빽빽했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듬직한 산에 오르면 그런 질문이 싸~악 사라집니다. 키 작은 풀들로 뒤덮인 이 산에서 2,000년도에 교황이 10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설교를 했었거든요. 10만 명이요. 신약학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수를 약 1만 2천명 내외로 보고 있으니, 이 산은 그 사람들을 다 포용하고도 넉넉했겠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로 불러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산이 이곳이기에 사람들이 이곳을 팔복산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지만 궁금증은 가시질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만 한 장소가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께서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시지 않은 이상, 그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한 번에 말씀을 전하셨을 수 있었는가 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바람을 이용해서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갈릴리 호수의 특성상 아침이면 바람이 호수에서 산 쪽으로 불어 오르고, 늦은 오후가 되면 반대로 그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서 산에서 호수 쪽으로 불어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셨다면, 바로 늦은 오후 즈음 살살 바람의 방향이 산에서 호수로 불어 내리기 시작할 즈음 잔잔한 미풍을 등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을 거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바람을 따라 사람들의 귀로 흘러들어가는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너무나 감격적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예수님이 영화에서처럼 목소리를 깔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고 말씀하셨을 것 같지는 않아요. 좀 더 우렁차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쳤을 것 같아요. 무언가가 속에서 꿈틀대는 듯한 강한 목소리 말이지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정말 엉뚱한 것 같아요. 생각해보세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가난한 자”, “애통한 자”, “핍박 받는 자” 같은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겁니다. 제 기준으로는 이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복 받을 것 같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복이 있다는 겁니다. 허! 참~

대학 다닐 때에는 이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민중”이 어떠니, “민중 예수”라느니 하면서 제가 알지도 못하는 말을 어디에선가 귀동냥으로 듣고 주절거렸는데, 사실은 아직까지도 이 팔복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저의 부끄럽고 한심한 신앙이지요. 한 책의 서문에 이런 옛 사람의 글귀가 인용되어 있더군요. “산에서 사는 사람이라 산중 이야기를 즐겨 나눈다. 5월의 솔바람 소리 들려주고 싶지만, 그대들 값 모를까 그게 두렵네.” 제가 정말 딱 그 짝입니다. 예수님의 값진 말씀의 값어치를 모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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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몇 달 전 릭 워렌 목사님의 책에서 이 팔복의 말씀에 대해서 써 놓은 글에 감동받았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것을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에, 저는 그냥 멈춰버렸습니다. 멈추려고 멈춘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거든요.

요즈음 제 마음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으로서의 부족함과 공허함 때문에 말입니다. 곧 제 삶의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의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 덕에 어부지리로 받는 복이 아니라…. 아! 말로 표현할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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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ost Has 2 Comments
  1. 모든사람에게 하나님은축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가진게 많은자들은 그것을 못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가난한자 애통한자 피박받는자 들이 예수님 말씀에 더 귀 기울일수 있었기때문에 복이 있는자라고 하심겁니다

  2. 김기배님 참 독특하게 글의 감동과 여운을 방해사시네요. 글을 읽고 받은 감동이 님의 댓글로 확 반감됩니다. 이후에 이글을 보실 분들을 위해 댓글을 자삭해 주실 수 없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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