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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서신] 주님의 눈물

[이스라엘 서신] 주님의 눈물

어김없이 또사순절기간이 다가 왔습니다. 사순절은 그동안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도 괜스레 숙연해지는 절기이지요. 그러고 보면, 교회력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냥 지나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 특별한 절기들을 지키면서, 헝클어졌던 신앙들을 다잡아내는 좋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새삼 사람을 위해 죽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자니,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계실 예수님께서 과연 여전히 흐뭇해하실까?” 하는 물음표가 영 가시질 않네요. 제가 보지 못하는 외진 구석 한 곳에서 혹 눈물을 흘리시고 계시지는 않을지….

톨스토이의 책을 읽다가 정말 기발한 상상력으로 쓰인 글을 읽었습니다. 내용인즉, 바알세불이 어둠 속에 갇히게 된 거예요. 바알세불이 어둠에 갇히게 된 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었던 바알세불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께 보기 좋게 패한 다음에 갈 곳이 없어져서 어둠 속에 갇히게 된 거지요. 그런데 그 바알세불에게 졸개들이 찾아옵니다. 그러고는 자기의 대장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상태로 세상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고 들떠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깜짝 놀란 바알세불이 어떻게 세상을 다시 이전의 혼란의 상태로 돌려놓았는가를 물어보고, 그 졸개들이 자기들이 한 일을 조목조목 보고하는 글이었습니다. 물론, 긍정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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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에 올라서면 예루살렘 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즐겨 감람산을 찾으셨으니, 아마 2,000년 전에 감람산에 올라서신 예수님께서는 웅장한 예루살렘 성과 그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하나님의 성전을 내려다 보셨을 겁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많은 이방인들도 분명히 예루살렘 성을 조망하기 위해서 이 감람산에 올랐을 겁니다. 지금 제가 오르듯이 말입니다. 오늘의 감람산에도 예수님께서 그셨듯이 예루살렘을 내려다보고 있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가 바로 흔히들 “눈물교회”라고 부르는 곳이에요. 예루살렘에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가장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를 손꼽아 보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이 아담한 교회를 제일 먼저 꼽습니다. 그 크기로 따진다면 골고다에 서 있는 성묘교회의 구석에 있는 제단 하나만 하지만, 그 교회의 생김생김과 그 교회를 세운 이탈리아인 건축가의 섬세한 신앙심을 그대로 호흡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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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서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에서 제자들에게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눅 19:29-30). 제자들이 아무도 타 본적이 없는 그 어린 나귀를 데리고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을 외치며 예수님께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렇게 열광하는 사람들의 입에 발린 소리들을 들으며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마 저라면 으쓱해져서 즐거웠거나, 애써 겸손한 척 제 몸을 낮추거나 했을 겁니다. 그러나 역시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른 이들이 본 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었을 뿐이었고(37절), 정작 제자들도 그리고 다른 무리들도, 아무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이지요. 아마 이런 무리들 속에서 예수님은 진한 외로움을 느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벅적거리는 사람들의 부산함을 헤치고 나귀를 타고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내려오던 예수님께서 감람산의 중턱에 떡하니 서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긴 한숨 내뱉고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 23:37-39)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눅 19:42-44)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입에 발린 칭찬과 찬송을 뚫고 나온 예수님의 이 탄식!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이 예수님의 깊은 한숨과 함께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 때에, 누가 그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겠습니까? 감람산 중턱의 이 눈물 교회는 바로 그 때 흘리셨던 예수님의 그 눈물을 기념하는 곳이랍니다.

지금이야 “눈물 교회”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이 교회의 이름은 Dominus Flevit (주님께서 우셨다)입니다. 주님께서 우셨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에서! 잠깐 이 대목에서 좀 쉬었다가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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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5세기 비잔틴 시대였습니다. 질곡의 세월 속에서 무너졌던 이 교회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불과 50년 밖에 되지 않아요. 이탈리아 건축가 “바를루찌”라는 사람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된 옛 교회의 터 위에 이 교회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교회의 윗부분이 다른 교회와는 달리 매우 부드러운 원형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상징하는 거지요. 교회 안은 참 좁습니다. 사람들이 40명 정도 들어가면, 앉을 의자가 없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제단에 새겨져 있는 모자이크와 교회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그대로가 한 폭의 그림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정중앙에 있는 옛 교회 바닥의 모자이크에서 제단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제단의 십자가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던 그 골고다에 맞추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슬람의 모스크인 바위사원과 겹쳐놓고서는 기독교의 십자가가 이슬람의 사원을 이겼다고 사진을 찍기 일쑤지만, 그것은 단지 21세기의 십자군 정신일 뿐입니다. 원래 이 교회의 의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거지요. 더욱 이 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싯딤나무(가시나무)입니다.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만들었던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예루살렘 주변의 가장 흔한 가시나무를 꼽아보라면, 역시 이 싯딤나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교회 앞에 심어놓은 이 가시나무와 교회의 십자가, 그리고 골고다가 만들어내는 엄숙한 그림 앞에서는 사진 찍기를 그만두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지나면,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이 되고, 부활절이 돌아올 겁니다.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준비하랴, 부활절 계란을 만들랴 많이 부산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때 감람산에서 그러셨듯이, 이렇게 부활절로 분주한 교회의 한 가운데에서 또 깊은 한숨 내뱉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혼돈” 속에 서 있는 우리를 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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