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holinesscode@me.com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1] 열두번째 사사 삼손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1] 열두번째 사사 삼손

❖ 땅을 분배 받았지만, 제대로 살지 못했던 지파  
단 지파는 지중해 해변, 비옥한 땅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지중해변의 오래된 항구 중의 하나인 욥바 항구를 포함하고 있는 이 지역은 농사를 짓기에 참 좋은 곳입니다.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는 밀 농사를 짓기에 최고의 장소였고, 또 지중해성 기후의 과실 농사를 짓기에도 딱 좋은 지역이 단 지파의 땅입니다. 단 지파의 땅을 머릿 속에 굳이 그려본다면, 우리 나라의 곡창 지대인 호남 평야 정도를 떠올리면 되겠네요. 이 지역은 욥바 항구를 기반으로 삼아서 해상 무역을 하기도 좋았습니다. 욥바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레바논으로부터 보낸 백향목을 받은 항구이자,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배를 탔던 항구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 다. 이곳 항구의 역사는 이미 기원전 15세기에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3세(Thutmose III)가 이 항구를 정복하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그 이전시대부터 쭉 항구로 사용되었을 겁니다. 해상 무역으로는 제격이지요. 단 지파의 땅은 해변을 따라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해변 길(Via Maris)이 지나는 지역이기에 육상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바다와 연계하여서 육상 무역을 원활하게 육성할 수 있는 상업의 중심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땅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차지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는 거겠지요. 그래서인가요? 단 지파의 운명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습니다. 단 지파가 받은 땅은 블레셋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지역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접하는 성서 지도에서는 블레셋의 다섯 도시와 그 주변 지역 만이 블레셋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혼동하기 쉽상인데, 그렇게 보아도 단 지파의 땅은 블레셋의 다섯 도시들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는데에다가 지중해 해변을 따라서 북쪽으로 이 그리스 이민자들의 도시들이 즐비하다는 것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이 그리스 이민자들을 흔히 ‘해양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블레셋’은 미케네 문명이 지중해 동편을 따라서 이주하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해양 민족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중해 해변을 따라서 농사 지을 만한 평지들은 거의 다 이 해양 민족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이었다 보아도 됩니다. 결국 단 지파는 분배받은 영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산간 지역과 붙어있는 구릉지대를 따라서 모여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도시가 바로 소라입니다.
❖ 나실인 삼손
임신하지 못했던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을 할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갑작스레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그녀에게 나타나서 약속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날 아이에게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을 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가 나실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때,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낼 것이라는 약속을 주었습니다.
나실인이 지켜야할 의무에 대해서는 민수기 6장에 나와 있습니다. 첫번째,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야합니다. 또 포도즙이 포도가 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온도가 높으면, 포도주가 되지 못하고 식초가 되어 버리는데, 포도 뿐 아니라,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식초가 되어 버린 음료들 조차도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포도즙도 마시지 말아야합니다. 포도즙과 포도주와의 경계선이 불분명할 수 있으니 사전에 아예 포도즙도 마사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좀 지나칠 정도가 아닌가 싶은데, 그냥 아예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건포도이던 포도이던 아예 포도 자체를 먹지 말랍니다. 심지어는 씨나 껍질 마저도 말이지요(민 6:3-4). 두번째, 머리를 깍아서는 안됩니다(민 6:5). 왜 머리를 깍지 말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중세 유대교에서는 관심을 자기에게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생각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세번째로, 사람의 시체 또는 동물의 사체에게 가까이 가서도 안됩니다(민 6:6). 죽은 동물들은 물론이려니와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누이가 죽었을 때에라도, 그들의 주검에 가까이가면 안됩니다. 정결하게 살아야하는 거지요.
    나실인은 ‘따로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나실인은 특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그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서의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일반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제사장처럼 엄격하게 정결의 예법을 지켜나가는 것이지요. 왜 나실인으로 서원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지 않기는 하지만, 마치 요즈음도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며칠을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금식 기도를 하는 기간에 유흥을 즐기지는 않잖아요. 그와 같이 구약 성경의 시대에 특정기간을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살면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지켜나가는 기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실인이라 불렀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나실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유일하게 삼손 만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태어나자 마자 곧바로 나실인이 된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나는 기묘자라 
임신하리라는 소식을 들은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쫓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이 준 약속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워낙에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또 놀라고 기쁜 소식이어서 그 사람의 이름도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도 묻지 못했습니다. 마노아도 기뻤지만, 자기의 눈과 귀로 다시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노아가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해주십시오.”(삿 13:8).
주님께서 마노아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왔다는 아내의 말에 마노아는 기뻤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지난번에 아내에게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를 마노아에게 다시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새끼 염소를 한 마리 잡아 대접할 터이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람은 마노아에게, 기다리라면 기다릴 수는 있으나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마노아가 번제를 준비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 ‘여호와 사자’, ‘여호와의 천사’ 모두가 같은 말이고, 이들은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이미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설명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정확하게 자기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마노아와 그 아내의 대접이 자기가 받아야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것임을 알았던 거지요. 번제는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것이고, 자신은 이 메세지를 전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겠다는 거절은 이 시대에 스스로 왕이 되려는 사사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비교가 됩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여호와의 사자의 등장으로 에둘러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과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사사들)을 비교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때,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름만이라도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정말 아기가 태어난다면, 그에게 그 영광을 돌리고 싶다면서 말이지요.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 마노아를 꾸짖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꾸짖음은 세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영광을 받아야하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이 소식을 가지고 온 그의 사자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사사들이 그랬습니다. 사사들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구원자이자, 이스라엘의 의사결정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사사로 부름받기는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경배를 받아야하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기드온 이후 사사들은 자기들이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려고 하였습니다. 마치 이웃 나라의 왕들처럼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마노아와 그 아내를 찾아온 하나님의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사 시대에 스스로 경배 받는 자리에 올라서려던 사사들을 에둘러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사람에게는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 신들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소유한다는 것은 오늘 교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들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을 소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을 언제라도 필요에 따라서 불러내기도하고,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려던 사사 시대의 사람들의 단면을 이 이야기에 투영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번째, 신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다신론의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서 밤하늘에 별이 한 개 밖에 없다면, 굳이 그 별에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라”고 하면, 누구나 바로 그 별을 봅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별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내가 보고 있는 그 별을 상대방에게 보려주려면, 그 별에 이름을 붙여야하는 것이지요. “새벽 하늘 반짝 반짝 빛나는 저 금성을 봐봐”라면서 말이지요. 그러니 신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미 다른 어떤 신이 있고, 그 신과 구별되는 지금 내가 만나는 이 신을 구별해서 인식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신이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시대에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마노아와 그 아내를 찾아온 하나님의 사람은 그래서 대답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내 이름은 기묘자”라고 번역을 해 놓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마치 ‘기묘자’인 것처럼 약간의 혼동이 생길 여지가 있는 번역을 해 놓았는데요. ‘기묘자’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저 ‘놀랍다’는 형용사일 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말로 번역한 것과는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략 세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לָ֥מָּה זֶּ֖ה תִּשְׁאַ֣ל לִשְׁמִ֑י וְהוּא־פֶ֛לִאי׃ ס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삿 13:18)
    첫번째는 잉태의 소식을 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아기를 허락하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이 존경을 받아야한다는 문맥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이름을 묻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부부를 향해서 “(왜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내 이름을 왜 묻느냐?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다더냐? 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다니,) 정말 놀랍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영광을 받아야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마노아와 그 아내에 대한 꾸짖음인 것이지요.
    둘째는 아직도 셀수 없이 많은 신들이 있다는 가나안과 주변 나라들의 사람들처럼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고 그 중에서 자기들에게 아기를 잉태하게 해주는 신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려는 의중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 본 것이라면,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이름(하나님의 이름)을 왜 묻느냐? (아직도 그들을 신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들처럼 내 이름을 소유하면 내게서 더 많은 것들을 얻고 나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놀랍구나!”
    셋째는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권위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것이라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내 이름(하나님의 이름)을 왜 묻는냐? 그 이름(내 이름)은 (네가 소유할 수 없다) 놀라울 뿐이다.”
❖ 삼손의 첫번째 여자: 그녀가 내 눈에 옳습니다 
흔히들 ‘삼손’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리는 연관된 이름은 ‘들릴라’일 겁니다.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하지요. 하지만, 삼손에게 여인이 한 명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들릴라 이전에 이미 사랑했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블레셋 여인이 있었고, 사사가 된 후에도 기생을 쫓아 다녔습니다. 먼저 블레셋 땅 딤나에 살던 여인과 얽힌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 딤나에 갔습니다. 사사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역사라고 이미 이 책을 시작하면서 말했었는데요. 삼손의 시대에는 블레셋 사람들과 서로 오가면서 공생하는 것이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이었나 봅니다. 단 지파가 해야할 일은 블레셋과 전쟁을 해서 블레셋 땅,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단 지파가 거주할 땅이라고 유산으로 받은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소명이고, 단 지파가 마땅히 해야할 바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의 삼손은 그곳에서 한 여인과 사랑을 빠져서 그 블레셋 여자와 결혼까지 하겠다고 합니다!(삿14:2)
    사실 이 때는 이스라엘 전체는 아닐 지라도, 적어도 블레셋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단 지파와 유다 지파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배를 받던 시대였습니다(삿 15:11). 그러니 단 지파 사람들이 감히 블레셋에 반대하거나, 항거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백보 양보해서 블레셋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치적으로야 압제 당하고 있는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블레셋과 교류를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실인이라면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한 약속은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치 제사장처럼 정결하게 살겠다고 서원한 이가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한다니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삼손이 블레셋의 딤나로 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삼손이 딤나에 내려갔다”(산 14:1)라고 말합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성경에서 오르고 내려가는 장면들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성경에서 어디 어디로 내려간다라는 표현이 나오면 불길한 사건의 징조로, 어디 어디로 올라간다라는 표현이 나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징조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는 이야기는 나실인으로 서원하여 태어났으나, 전혀 나실인 답지 않게 살아갔던 삼손이 인생의 저 밑바닥을 찍는 이야기의 서두로 제격입니다.
    삼손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부모에게 통보하였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여인이 이스라엘 공동체 중의 하나가 아니라 블레셋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삼손의 부모는 삼손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게 하겠노라고 약속한 마노아와 그 아내가 어떻게 정결하지 않은 이 결혼을 허락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합니다.”(삿14:3) 우리 말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만,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내 눈에 옳습니다.” “그녀가 내 눈에 좋아 보입니다”(히. 히  야쉬라 베에이나이 הִ֖יא יָשְׁרָ֥ה בְעֵינָֽי׃).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그 많은 표현들 가운데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그녀가 옳고 좋아 보인답니다. 그녀의 삶의 방식이 옳고 좋으며, 그녀가 섬기는 신이 옳고 좋고, 그녀와 어울리는 블레셋 사람들이 옳고 좋답니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가 다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블레셋 사람이면, 그리고 그 블레셋의 삶의 방식이 이스라엘 하나님이 제정한 율법에 벗어난 것이라면 위험합니다. 이것은 말하나마나겠지요. 삼손의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스라엘 공동체 중 단 지파의 일원이지만, 지금은 이 블레셋 여자가 맞답니다. 옳답니다. 좋아 보인답니다. 그 여자의 삶의 방식과 그 여자가 섬기는 신과 문화, 그 모든 것들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옳다’ ‘좋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삼손의 눈’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눈'(히. 베에네이 아도나이  בְּעֵינֵ֣י יְהוָ֑ה)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악을 행하였는가 그렇지 않은 가의 기준도 ‘하나님의 눈’이었습니다(삿 2:11; 3:7,12; 4:1; 6:1; 10:6; 13:1). 모든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여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의 길을 걷고, 자기의 눈에 보기에 좋은대로 따라갈 지라도, 하나님에게 민감하고, 그 율례를 지켜나가는 것에 예민해야하는 나실인 삼손은 그러면 안되는 거였어요. 그런데도 신앙적으로 그 누구보다 철저해야할 나실인 삼손마저 ‘자기의 눈에 좋아보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사사기를 최종적으로 하나의 책으로 묶은 이는 이 가운데에도 일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이것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삼손의 이야기에서 나실인이지만 나실인 답지 않은 삼손을 비판합니다. 이 실랄한 비판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 삼손이 사자를 죽이다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니만,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가서 한번 만이라도 아들이 좋아하는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삼손과 그 부모가 함게 딤나를 내려가다가 딤나에 있는 어떤 포도원에 도착했는데, 어린 사자가 덤벼들었습니다. 아마 부모님이 어딘가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나,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딤나 근처 포도원까지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함께 따라갔으나, 이게 아니다 싶어서 그 둘은 그냥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손 혼자서 그 사자와 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와 그 아내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주일 학교 때, 선생님이 재미있게 들려주시던 이 이야기는 삼손이 그 만큼 힘이 세고 용맹한 용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삼손이 힘이 세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이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기를 일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이야기가 바로 사자를 죽인 이야기이고, 그 뒤를 이어 나오는 이야기도 일관되게 삼손이 나실인의 의무를 저버린 예들입니다. 어린 사자를 죽였으니, 삼손은 나실인의 규례를 어긴 셈이 되는 거예요. 민 6:6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체 뿐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다가 죽은 동물의 사체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시체 또는 사체를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어린 사자를 찢어 죽였으니 자연스럽게 동물의 주검과 접촉한 사람이 되고, 그 과정에서 사자의 피와도 접촉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부정하기 때문에 하지 나실인이라면 하지 말아야하는 것들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규례를 깨뜨린 겁니다.  나실인은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아니지만, 그에 해당하는 엄격한 정결이 요구되었습니다. 물론 블레셋 땅의 여인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도 나실인의 삶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인데, 게다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금령을 어긴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사자를 죽인 것을 말하지 못한 겁니다(삿 14:6).
    얼마 후, 결혼 계획을 마무리 짓고 딤나의 블레셋 여자를 신부로 데려가려고 삼손은 다시 한번 부모님과 함께 딤나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죽였던 사자의 주검에 벌떼가 있고, 그곳에 벌집을 지어 놓았는지 꿀도 있는 겁니다. 삼손이 그 꿀을 떠서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참 예의바른 것같지요.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삼손이 예의 바르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사자를 죽이며 나실인으로서 지켜야할 의무를 저버린 삼손은 다시 그 사자의 사체를 만진 셈이 됩니다. 동물의 사체를 만진 수준이 아니라, 그 사체에 집을 짓고 사는 벌들의 벌집에서 꿀까지 떠서는 자기도 먹고 심지어는 부모에게까지 주었습니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는 모든 것들은 부정하다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사자의 주검에서 떠낸 꿀이니, 이 꿀이 부정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규례를 어긴 것은 고사하고, 자기의 부모들까지 부정해 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거예요(삿 14:8-9). 그나마 그런 행동을 부모가 옳게 여기지 않을 것같다는 것은 인지했나 봅니다. 꿀을 드리면서도 죽은 사자의 몸에서 떠왔노라고는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지요. 참 답답한 나실인입니다.
❖ 이상한 결혼식-잔치집에서 벌어진 일 
    결혼 잔치라고 하지만, 그리 보기 좋은 결혼은 아닙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남자, 그것도 이스라엘의 나실인과 블레셋 여자와의 결혼이라는 이상한 결혼식이었는데에다가, 이 결혼식을 성사시키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삼손이라는 것도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풍속에 의하면, 결혼을 위한 배우자의 선정부터 결혼식의 모든 준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삿 14장의 이야기에서 삼손의 부모님이 특별히 이 결혼을 위해서 한 일이 없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의도적으로 이것을 부각시켰습니다. 나실인인 삼손과 블레셋 여인이 만난 것으로부터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이스라엘의 전통과 맞지 않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거지요.
“그의 아버지는 사돈 될 사람의 집으로 갔다. 삼손은, 신랑들이 장가갈 때 하는 풍습을 따라서, 거기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보자, 젊은이 서른 명을 데려다가 그와 한 자리에 앉게 하였다.”(삿 14:10-11)
삿 14:10-11에서 말하는 ‘풍습’도 이스라엘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에는 결혼식 잔치 기간동안 신랑에게 남자 서른 명을 친구 삼아 그 옆에 붙여 두는 전통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블레셋의 풍습일 것입니다. 삼손은 마치 블레셋 사람처럼 행동하며, 블레셋의 전통과 문화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 ‘삼손의 눈’에는 블레셋의 것이 ‘좋아 보였고, 옳아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도 이스라엘의 풍속이 아니라, 블레셋의 풍습을 쫓았을 거예요. 그것이 ‘좋아 보이고, 옳아 보이니까’ 요.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살아야하는 나실인의 삶과 어쩜 이렇게 정반대 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사사기 연구자들 가운데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이 결혼식이 그리 편한 결혼식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합니다. 블레셋의 풍습에서 신랑이 오면 그들에게 그 가문의 사람 서른명을 친구로 만들게 해서 잔치 기간 내내 신랑과 함께 있게 하는 풍습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성격과 그 본심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잔치 기간 내내 포도주로 술이 취한채 자기 가슴 속에 담아 놓은 이야기라던가, 자기의 성장 배경이나, 이 결혼식을 대하는 신랑의 마음이 슬며시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온 신랑은 같은 블레셋 사람도 아니고, 이웃이기는 하나, 언제 적으로 돌변할 지 알 수 없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도 이 결혼식 뒤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풍습에 따라서 삼손의 주변에 삼십 명의 남자들을 두어서 삼손이 가진 다른 뜻은 없는지 확인도 할겸, 또 생각지 못한 갑작스런 일이 발생할 경우, 삼손을 제지하거나, 싸울 수도 있는 일종의 안전 장치로 이 사람들을 배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 또한 매우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이 그리스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배경에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적인 결혼 풍습이 두 개가 삿 14장에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이 결혼식이 되면, 새롭게 공동체와 연관을 맺게 되는 새로운 구성원인 신랑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에게 삼십 명의 친구를 붙여 주는 것이고, 또 다른  풍속은 신랑의 주변에서 잔치 기간 내내 신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으면서 수수께끼나 노래들을 서로 주고 받는 풍습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의 수수께끼는 갑작스런 것이 아니라, 이런 그리스의 문화적 정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겠지요.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하나님의 전통의 수호자인 나실인이 그리스 문화를 따르는 것을 탐탁하게 여길리가 없겠지요. 결국 이 결혼식은 파탄으로 이어집니다. 애초부터 하면 안되는 결혼이었습니다.
❖ 블레셋과의 싸움: 안전을 위해서 형제를 버리다  
삼손이 수수께끼의 답을 아내가 될 블레셋 여자에게 알려주었는데, 삼손은 아내가 된 그 여인이 답을 딤나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 만치, 이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블레셋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블레셋 안에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블레셋 도시 아스글론으로 가서 그곳 사람 삼십명을 죽이고, 노력하여 수수께끼의 정답을 낸 사람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고는 분에 겨워 소라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삿 14:19-20).
    얼마 후, 밀 거둘 때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딤나의 아내에게로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성질을 부리고, 결혼식 마지막 날을 망친 후, 혈기를 부리며 혼자서 집이 있는 소라로 돌아온 것이 미안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장인의 집에 찾아가보니,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화가 난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여우의 꼬리와 꼬리를 서로 매고 그 사이에 홰를 매달아서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여우를 내몰았습니다. 이미 베어 쌓아 놓은 곡식가리와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원까지 다 태워 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일년의 농사를 망쳐버린 대가로 삼손과 결혼시켰던 딤나에 사는 삼손의 장인과 삼손과 결혼식을 하였던 그 여인을 죽이고서 유다 사람들과 전쟁을 치루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제일 억울해할 사람들은 유다 지파의 사람들일 겁니다. 단 지파,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는 영토와 맞대고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정복전쟁의 전통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냥 손바닥 만하더라도 내 땅이 생겼으니, 그곳에서 만족하며 대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과 싸우려고 삼손이 숨어 들어온 유다 땅까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삼손의 불똥이 유다 지파에게 튈 새라 걱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유다 땅 에담 바위 틈에 숨어 있는 삼손을 잡아다가 결박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넘겨줍니다(삿 15:9-13). 이것은 충격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그동안 지파들 사이의 연대의식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전쟁 이야기에서 슬며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에둘러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지파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간다는 수준이 아니라,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형제도 적들에게 내어주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브레이크 없이 계속 사사 시대의 역사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있는 겁니다.
❖ 삼손 사사가 되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레히에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을 넘겨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죽이려고 달려들 때,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였습니다. 나실인이었던 삼손이 사사가 되는 순간입니다. 부족하지만, 정말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들어서 블레셋과 싸우게 하시고, 단 지파가 이 전쟁으로 그동안 잊었던 가나안 정복의 소명을 새삼 깨닫기를 원하셨는지 모릅니다. 삼손을 묶고 있던 새 밧줄은 맥없이 끊어졌습니다. 마침 그곳에 나귀의 새 턱뼈가 있었습니다. 삼손은 그것을 집어 들고서는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입니다. 삼손은 대단한 영웅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전쟁의 승리를 이끈 것은 하나님이셨지만, 삼손은 그 승리를 여지없이 자기의 능력으로 한 것인양 포장을 하고, 자기 멋대로 전쟁을 했다는 것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매우 집약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판에서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일 때,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싸웠다고 묘사하고 있는데요. 새번역 성경에서는 ‘싱싱한 당나귀의 턱뼈’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싱싱한 나귀의 턱뼈'(히. 레히 하모르 테리야 לְחִֽי־חֲמ֖וֹר טְרִיָּ֑ה)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봅니다. 최근에 죽은 나귀의 사체의 턱뼈를 뽑아서 싸우는 삼손이 천 명을 죽이든, 만 명을 죽이든, 나실인의 규례를 깨고 죽은 동물의 사체를 만진 셈이 됩니다. 싱싱한 턱뼈이니 피를 만질 수 밖에 없었을 텐데, 제사장과 같이 엄격하게 정결법을 지켜야하는 나실인이 피를 만져 부정하게까지 되었네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삼손의 위대한 승리가 아니라, 승리를 위해서 지켜야할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승리라는 결과물만을 쫓아가는 삼손의 모습과 그 시대의 세태를 이 이야기 속에 담아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삼손은 그 승리가 자기 승리인 양, 스스로 취했습니다.
“나귀 턱뼈로 한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삿 15:16)
전쟁을 승리한 뒤에 부른 드보라의 노래나(삿 5),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 이집트 군인들을 바다에 묻고 노래한 미리암의 노래나(출 15) 모두가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1대 1000의 전쟁에서 자기가 이겼노라고, 내가 죽였노라고 노래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전쟁이었는데, 정작 삼손은 전쟁 중에 한번도 그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지도 찾지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죽은 나귀의 사체에서 뜯어 잡은 싱싱한 턱뼈를 들고서 자기의 용맹 스러움과 힘을 과시할 뿐이었습니다. 정작 하나님을 찾을 때는 언제였는지 아시나요? 전쟁이 다 끝나고 열심히 싸운후 너무 목이 말랐거든요. 그때 물 좀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게 부르짖었다고 합니다(삿 15:18).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제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사 마저도 자기의 업적과 승리가 마치 자기의 뛰어난 능력때문인 마냥 승리에 취해서 자기를 높이는 삼손의 모습을 고발하면서,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내 목이 마르다’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원할 때만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삿 15:18-19).
❖ 삼손의 두번쩨 여자: 삼손의 여성 편력  
그가 사사로 이스라엘의 의사결정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이십년이라는 숫자(삿 15:20)가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재앙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사실 재앙이었습니다.
    들릴라를 만나기 이전에도 사사가 된 삼손이 블레셋의 가사로 가서 그곳의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가 짧막하게 나옵니다. 이야기 역시 삼손이 가사 성읍의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가지고서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올라갔다는 이유로 삼손이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구절로 이해하거나, 삼손이 블레셋의 저 깊숙한 가사 지역에까지 알려졌고, 또 그들과 싸워서 이겼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삼손은 그렇게 힘이 센 사람이고, 그 힘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힘이 두려워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기를 잠시 멈추었을 수도 있습니다. ‘삼손이 이룬 업적’이라는 측면으로 삼손의 이야기를 바라보면, 이 이야기 조차 영웅담입니다.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평가는 다릅니다. 가사로 내려가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는 삼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앞뒤의 이야기가 모두 삼손과 연결된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비추어 보아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개인의 욕망을 쫓는 삼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이 짤막한 이야기를 비교적 긴 삼손의 여자들의 이야기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집어 넣은 것입니다. 본인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사라는 책임 의식보다는 그저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갔던 사람이 삼손이라는 것이지요. 자기의 눈에 좋아 보이는대로 말입니다.
❖ 삼손의 세번째 여자: 들릴라 
삼손은 소렉 골짜기에 살고 있었던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소렉 골짜기는 삼손의 집이 있는 소라와 벧세메스 사이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들릴라가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소렉 골짜기에 살고 있었다고 말할 뿐, 그 가족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살던 소라도 소렉 골짜기에 있는 마을입니다. 소렉 골짜기는 동쪽으로는 예루살렘 못미처 유다 산지로 올라가고, 서쪽으로는 블레셋 평야로 내려가기 때문에 소렉 골짜기에 산다는 사실이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삼손의 첫번째 여자와 이야기의 흐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들릴라를 블레셋 여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또 블레셋 사람들의 우두머리들이 올라와서 삼손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지를 알아내 달라고 스파이 활동을 종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들릴라가 블레셋 여자였으리라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들릴라(히. 델릴라 דְּלִילָה)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셈족의 이름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예요. 그러니 혹 이스라엘 공동체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 있습니다. 들릴라는 돈에 약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블레셋 사람의 통치자들이 그 여자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당신은 그를 꾀어 그의 엄청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잡아 묶어서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시오. 그러면 우리가 각각 당신에게 은 천백 세겔씩 주겠소.””(삿 16:5)
그냥 은 천백 세겔이 아니라, 각각 그만큼씩 주겠다고 하였으니, 블레셋 사람들이 몇명이나 들릴라를 찾아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블레셋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도시를 대표해서 한명씩 왔다는 가정 아래에서 적어도 오천 오백세겔은 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잘 알다시피, 삼손은 세번이나 들릴라를 속이지요. 처음에는 마르지 않은 새 줄 입곱 가닥으로 묶으면 자기의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두번째는 한번도 쓰지 않은 새 밧줄로 결박하면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습니다. 세번째는 들릴라가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사실을 말합니다. 머리카락이 잘리면 힘이 떠나간다고요. 그런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그의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고, 나실인의 의무가 머리카락을 깎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온다고 한다면, 삼손의 힘의 원천인 ‘나실인이 지켜야할 의무’는 그것 만이 아니었지요. 삼손은 지금까지 나실인이 지켜야할 의무를 모두 어기면서 살았습니다. 나실인의 의무에 대해서 진지하게 지킬 의사가 있었나 의심스러웠던 사람이 삼손입니다. 다른 것은 다 지키지 않아도 되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지켜내면 힘이 나온다? 이것은 말이 안됩니다. 오히려  “나의 머리는 면도칼을 대어 본 적이 없는데, 이것은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 사람이기 때문이오. 내 머리털을 깎으면, 나는 힘을 잃고 약해져서, 여느 사람처럼 될 것이오”(삿 16:17)라는 말은 삼손이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적인 말입니다. 의도만 한다면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들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어길 수 있지만, 머리카락 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삼손은 그렇게 드러나는 자기의 모습과 그 모습 때문에 얻게 되는 자기의 평판에 마음을 두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지적하는 것입니다. 삼손의 힘이 사라진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삿 16:20).
❖ 시각을 바꾸면 알게 되는 것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떠난 삼손을 붙잡아 그에게 내린 형벌이 매우 상징적입니다. 삼손의 눈을 빼버린 거예요. 끔찍하지요.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삼손의 형벌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눈’으로 판단하며 여자들을 선택하고, 블레셋의 것을 좋고 옳게 보았던 삼손이 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사사 시대의 역사들을 정리하면서 알게된 가장 큰 문제는 사사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이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눈’과 소견대로 살아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살던 시대도 여전히 그랬을지 모릅니다. 결국 이런 삼손과 이런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 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눈을 빼버리는 것이지요. ‘자기의 눈’을 말입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삿 16:22). 그러나 삼손은 힘이 다시 세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잡힌 이후로  머리카락이 조금 더 자란들, 지금까지 몇십년 동안 한번도 자르지 않은 그 머리카락의 길이만 해질까요.
    삼손은 ‘자기 눈’이 뽑히자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신을 위해서 드리는 큰 제사의 날에 삼손은 사람들이 모인 그 건물을 버티는 기둥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거 아세요? 삼손의 일대기를 기록하면서 삼손이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은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자기 눈이 뽑혀 나갔을 때 말이지요.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삿 16:28)
기둥은 넘어갔고, 건물은 무너졌습니다. 그 안에 있었던 삼천명 가량의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기 눈이 뽑히고 나서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나실인이자 사사인 삼손의 마지막은 해피 엔딩같지만 전혀 행복한 결말이 아닙니다. 전쟁터 같은 그곳에서 사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적들과 함께 죽은 사사가 마지막 사사 삼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단 지파는 더이상 그나마 살고 있는 그 좁은 땅에서 떠나야했으니 말입니다. 결국 ‘자기의 눈’을 따라서 자기의 소견대로 살았던 삼손과 이스라엘 공동체 중의 단 지파는 유일하게 땅을 잃어버린 지파가 되었습니다. 소명을 잃어버린 사람은 받은 모든 은혜를 함께 잃어버린다는 것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야기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