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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3] 두번째 사사 에훗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3] 두번째 사사 에훗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하나님의 백성 vs 이방인)

이스라엘의 첫번째 사사인 옷니엘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사사들의 이야기의 시작은 매우 도전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12절)

서론에 무언가 사사를 설명하는 이야기라던가, 또는 이 시대를 국제 사회의 배경이라든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사사의 집안 환경이라든가하는 배경 설명은 다 던져버렸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꼭 해야하는 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악한 일들을 하였다.” 앞으로 이 말은 조금 형태는 변할 지라도 사사들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반복될 겁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사사기 역사가가 전하려는 하나님의 메세지라는 뜻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에홋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똑같은 표현을 두번 연속으로 반복합니다. 이 짧은 문장으로 삶의 기준이 여호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자신)인가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삶의 결과는 모압왕 에글론의 압제였습니다. 무려 십팔년에 걸쳐 말이지요. 에글론과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리는 여리고를 점령하였다는 짧은 전쟁 이야기가 13절에 소개됩니다. 모압과 암몬이 혹시 어떤 사람들인지 아시나요? 모압과 암몬의 기원은 창세기 19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한 롯이 소돔을 떠나 소알에 이르러 그 주변 산에 올라가 한 굴에서 살았습니다. 롯은 이제 세상이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 롯과 함께 굴에 피하였던 두 딸이 낳은 아들들의 이름이 모압과 암몬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이 아이들의 출생이 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는 잠시 뒤로 하고, 혈통으로 보면 이 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친족이고 이스라엘의 친족이 되지요. 이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핵가족 시대인 오늘과 달리, 확대 가족 시대였으며 동시에 친족 사이의 교류와 관계를 매우 중시하던 시대가 구약 성경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대단히 가까운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압과 암몬을 이방인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리고 성경에도 이들을 이방인 취급을 합니다. 많은 부분 성경에서는 “이방인”이라는 기준을 인종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라는 개념은 철저하게 신앙을 기준으로 합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도 혈연으로 굳이 따지면, 아브라함의 가족들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방인인 것입니다.

고고학의 도움으로 모압 사람들이 “그모스”(Chemosh)라 불리는 신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민 21:29; 왕상 11:7,33; 왕하 23:13; 렘 48 참조). 그모스를 섬기는 순간, 스스로를 바라보는 정체성(기준)이 바뀌어집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을 이야기하는데요.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정체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자기 정체성을 세워 나아가고 그것을 삶에서 지키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경건한 사람들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정체성은 “나와 네가 같다”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정체성은 “다름”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도 A이고, 당신도 A이다”라면 나만의 정체성은 없는 겁니다. 모두가 A이니, 그냥 A인 겁니다. 세상에 이 둘만 살고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 둘은 A가 무엇인지도 모를 겁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세뇌 당한 전체주의 국가를 상상해 보시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세상에 두 명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A라 부르는데, 다른 한 명은 스스로를 B라고 부른다면, 이들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A라 부르는 사람은 B가 누구인지, 그리고 B가 어떤 생각과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와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너는 B이지만, 나는 A야.”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그러니까 정체성을 동질성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유일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 늘 갈등의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런 면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삶과 생각에서 갈등하는 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라, 매우 당연한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주인 삼고 그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러므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에훗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면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선언하는 말은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들을 기준 삼아 살았다”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고요. 또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모압의 백성(모압의 신인 그모스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겁니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이라 부르지만, 마치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된 셈입니다.


종려나무 성읍을 빼앗기다

이스라엘이 에글론에게 압제 당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에글론이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였다고 말합니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야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3절)

“종려나무 성읍”이라는 곳은 여리고입니다.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신 34:3)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대하 28:15)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많은 성읍들 중에서 굳이 여리고를 콕 집어서 이야기했을 때에는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여리고가 모압 지역에서 국경 도시로서는 제일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요단강 건너에 여리고 말고도 많은 도시들이 있었는데, 여리고를 마치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데에는 아마도 여리고를 빼앗긴 것에 대한 충격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요?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고 있는 이 당시 사람들에게 여리고는 아주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여리고는 그 역사가 10,000년이 넘는 오아시스 도시입니다. 앞으로는 요단강, 그리고 늘 신선한 물이 터져나오는 샘이 있고, 유대 산지 쪽에서 터져 나오는 오아시스의 물들이 흘러들어오는 마을입니다. 상대적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30mm이하입니다. 물이 풍부하고, 일조량이 많고, 비가 적은 곳에서는 유실수 농업이 발달하는데요. 그래서 여리고는 종려나무(대추야자)가 풍성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메마른 누런 광야에 푸른색 종려나무 잎으로 뒤덮여 있는 여리고를 말이지요. 자연스럽게 여리고는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도시였을 겁니다. 정치를 안다면, 역사도 깊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도시를 방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였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철옹성 같은 풍요로운 도시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 없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냥 성을 열세 바퀴를 돈 것과 양각 나팔을 분 것 뿐이었습니다. 물론 성벽이 무너져 내린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에 들어가서 점령하며, 칼을 들고 싸웠다는 이야기가 간단하게 한 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만(수 6:21), 여호수아 6장의 그 장엄한 전쟁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하나님이셨고, 싸우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미 성이 무너져 내린 순간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피흘림 없이(전쟁없이) 주신 도시인 여리고를 에글론에게 빼앗겼습니다. 전쟁으로 잃어버렸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에글론이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였다”라는 짧은 기사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성을 잊고 살 때, 그냥 주신 것을 다시 되찾으신다는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가나안의 것이 더 좋아 보였고, 비교적으로 안정적이어 보이는 모압의 삶을 동경하였고, 여호와 하나님보다 그모스가 더 매력적이었던 이스라엘 자손들! 그들이 기대했던 삶과 실제로 그모스의 아래에서 모압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살이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것 또한 삶의 아이러니 입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네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찾을 때, 머리 한번이라도 쥐어 박지 않으시고 정체성을 잃고 그모스의 백성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를 보내셨으니 말입니다.

베냐민 사람 구원자 에훗

여기에서 학자들 사이에서 몇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의 내용이 어찌보면 별것이 아닌데, 그래도 재미삼아 한번 알아놓으며 재미 있을 만한 잡다한 지식 중의 하나로 소개해 볼께요. “에훗이 사사인가, 아닌가?”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훗은 당연히 사사이지요. 그런데, ‘사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쇼페트’ שֹׁפֵט 인데, 이 단어가 에훗을 가리키는 말로 성경에 쓰여있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어근 שׁפ”ט 가 가지는 의미가 “재판하다”(저는 이 말을 “의사결정을 하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고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말했었습니다)입니다. 그런데, 이 어근을 사용하는 “재판하다” 또는 “의사결정을 하다”라는 말조차도 에훗의 이야기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홋이라” (삿 3:15 상반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 에훗을 ‘사사’가 아니라, ‘구원자’ (히. 모쉬아 מוֹשִׁיעַ)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에훗을 과연 ‘사사’라고 부를 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한 번쯤 가져볼 만합니다. 그러나, 사사의 역할이 곧 구원자이기에 학자들의 작은 논쟁은 그냥 그들 만의 것으로 잠시 제쳐두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상반절의 다른 부분이거든요.

성경에서 에훗을 (1) 베냐민 사람, 그리고 (2) 왼손잡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말로 번역된 성경은 참 번역이 잘된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모든 번역은 히브리어에서 자국어로 번역되는 순간 ‘상상력’의 가능성을 없애 버립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 독특한 표현 방법 때문에 여러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데, 번역이 되면, 그 모든 상상력이 번역된 ‘말’에 갇혀버리기 때문이지요.

‘베냐민'(히. 빈야민 בִּנְיָמִין)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의 막내, 요셉의 동생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보호함을 받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베냐민의 후손들을 부를 때, 성경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1) 쉐베트 빈야민 שֵׁבֶט בִּנְיָמִין 또는 (2) 마테 빈야민 מַטֵּה בִּנְיָמִן, 마지막으로 (3) 브네 빈야민 בְּנֵי בִנְיָמִן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딱 한번 (4) 하벤야미니 הַבֵּנְיְמִינִי라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대상 27:12). 그런데, 사사기에서는 에훗을 히브리어로 “벤-하야미니” בֶּן־הַיְמִינִי 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를 조금 배워보신 분들은 아실 수도 있는데, 이 표현 방법은 ‘아들’이라는 명사 ‘벤’과 ‘오른쪽/남쪽/힘’이라는 명사 ‘야민’이 서로 결합된 형태로 야곱의 아들 ‘베냐민’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베냐민’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풀어서 사용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사사기를 기록하며 에훗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의 언어의 유희(Word-play)입니다. 일부러 ‘베냐민 지파’를 떠올리는 표현을 사용하기 보다는 ‘베냐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여러가지 다른 의미를 더올리게 하면서 그 다음 표현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왼손잡이’라는 말입니다.

왼손잡이 에훗

문자적인 의미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지파 출신의 에훗이 ‘왼손잡이’라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 합니다. ‘왼손잡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 방식은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 אִישׁ אִטֵּר יַד־יְמִינוֹ 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해석하기가 좀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테르’ אִטֵּר 라는 히브리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예요. 히브리어를 굳이 직역하자면, 사람은 사람인데 오른 손이 ‘이테르’한 사람이라고 의미라거나, 오른 손을 ‘이테르’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어찌되었든 ‘이테르’라는 뜻을 모르는 한, 도무지 그 뜻을 알수 없는 표현방법입니다. 언어학에서 Hapax Legomenon 이라 것이 있습니다. 그냥 짧게 Hapax 라고도 하는데요. 단 한번 나오거나, 또는 너무 드물게 본문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모르는 옛 말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테르’가 바로 Hapax Legomenon입니다. 그럼 이런 단어들이 구약 성경에서 툭툭 튀어 나올 때에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이 성경을 읽었던 옛 사람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을 읽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또는 타인의 강제에 의해서 사마리아와 유다 땅을 떠나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이집트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그곳에 정착할 무렵, 그 땅에서 태어난 2세들은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어요. 이렇게 번역된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릅니다(라. 셉투아진타 Septuaginta 약어로는 LXX). 그럼 우리말 성경에는 ‘왼손잡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를 LXX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을까를 보면, 당시 유다 공동체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LXX에는 이 표현을 번역하면서 ‘암포테로덱시오스’ ἀμφοτεροδέξιος 라는 단어를 채택하였습니다. 이 말은 ‘양쪽’을 의미하는 ‘암포테로이’ ἀμφότεροι 라는 말과 ‘오른 손’을 뜻하는 ‘덱시오스’ δεξιός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기원전 3세기 중반에서 2세기에 이르는 시기 사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 번역가들은 당대에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를 ‘두 손이 모두 오른 손인 사람’, 두 손을 모두 오른 손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왼손 마저도 오른 손 마냥 편안하게 무기를 잡을 수 있었던 양손잡이로 이해했다는 거지요. 비록 오른 손의 아들(베냐민)로 태어났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오른 손의 역량을 키울 때, 왼손도 갈고 닦아 오른 손처럼 사용했던 사람,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뛰어 넘어 살아가던 에훗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에훗, 영광이 누구에게 있는가?

에훗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걸었던 예로, 남들은 모두 오른 손을 사용하며, 그것에 가치를 두고 살며, 그것에 만족했던 반면에, 에훗은 왼손 마저도 사용하려고 노력하여 왼손을 오른 손처럼 사용하였다는 것을 말했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왕 에글론을 따르고 그의 신 그모스를 섬겼지만, 에훗은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다른 길,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섬겼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들이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겼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대 풍습을 하나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힘센 다른 국가를 섬길 때에는 자연스럽게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형성 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동안 섬겼다면, 자연스럽에 십팔년 동안 이스라엘이 신하된 공동체로서 모압의 왕 에글론을 자신들의 가장 최고의 왕으로 삼아 살았던 셈입니다. 이렇게 신하된 나라의 몇가지 의무들이 있었는데요. 첫번째는 때를 맞추어 공물을 보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나라의 최고 신을 우리나라의 신전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그 신을 위해서 제의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도 있으나, 주인 삶은 나라의 신이 우리의 신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제의인 것이지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모압의 신이 내 나라의 신이 되는 겁니다. 모압의 압제 아래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여호와께 부르짖기 이전 열여덟해 동안 자의로든 억지로든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겼을 것은 너무나 분명해요. 그모스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리며 살았던거지요. 자기들의 기준과 눈으로 보기에 모압의 것이 더 안정적이어 보이고 좋아 보였으니까요.

에훗은 달랐습니다. 에훗 (히. 에후드 אֵהוּד)의 이름은 ‘어디에?’라는 뜻은 히브리어 ‘에’ (אֵי)와 ‘영광, 힘’이라는 의미의 ‘호드’ (הוֹד)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영광이 어디에 있는가?’, ‘힘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에훗의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조금 더 문명화되고 안정적인 삶과 생존을 위해서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선택하였고, 그들이 섬기는 모압의 왕 에글론과 그의 신 그모스로부터 그것들을 찾으려 하였지만, 에훗은 달랐습니다. 오직 그 영광과 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온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에글론을 죽이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에글론을 만나다

에훗이 요단 강을 건너 모압 땅으로 들어가는 표면적인 명목은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에훗이 한 규빗이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가지고 가는데요. 우리말 성경에는 ‘한 규빗’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른 단위로 쓰여있습니다. 규빗이라는 단위를 히브리어로는 ‘암마’ אַמָּה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훗이 가지고 간 칼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칼의 길이는 ‘암마’가 아니라, ‘고메드’ גֹּמֶד 라는 단위로 표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 단어도 위에서 말한 Hapax Legomenon 입니다. 성경에서 딱 여기에서만 사용된 길이의 단위이거든요. 그래서 이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22절에서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보아서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길이 였다는 것은 분명하고, 칼자루까지 뚱뚱한 에글론의 몸에 따라 들어갔는데, 칼끝이 나온 정도라면, 한 규빗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표현이 하나 있어요. 에훗이 에글론에게 갈 때,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칼을 찼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겁니다(16절). 아래의 그림은 앗시리아의 왕 아수르나시르팔(Ashurnasirpal)이 사자 사냥을 하는 장면입니다. 왕이 칼을 찬 허리를 보세요. 왼쪽 허리 춤에 찰을 찼습니다. 고대의 벽화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가 왼쪽 허벅지에 칼집이 오도록 칼을 찹니다. 왼쪽 허리에 칼을 차고, 오른 손으로 뽑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에는 에훗이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칼을 찼다고 말하지요? 이것 역시 에훗이 왼손을 잘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에글론을 표현하면서 ‘매우 비둔한 자’라고 말하는데요. 조금은 사심(私心)이 담겨 있는 번역이 아닌가 해요. 히브리어 원문에는 비둔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리’ בָּרִ֖יא 라는 단어인데요. 우리말의 어감상, ‘비둔하다’라는 말에는 미련하고 제 한몸 가누지 못할 것같은 어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은 “살지고, 튼실한” 거예요. 비둔한 것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지요. 놀라운 것은요. 이 형용사 ‘바리’라는 단어는 사람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하던 단어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여러번 ‘바리’가 사용되지만, 사람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된 예는 에글론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대부분 곡물이나 동물들을 표현할 때 이 형용사를 사용합니다. 바로가 7년간의 풍년을 예고하는 꿈에서 나일 강가에서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올라오는 꿈을 꾸잖아요? 이 살지고 누가 봐도 튼실한 소를 표현할 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바리’라는 말을 썼습니다. 바로가 7년간의 풍년을 예고하는 꿈에서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잖아요? 그 ‘무성하고 충실한’이라는 말이 ‘바리’입니다. 이것이 사사기를 기록한 사람의 의도입니다. 에글론이라는 사람의 이름에는 히브리어로 “에겔” עֶגֶל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이 뜻은 “송아지”인데요. 사사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에글론 왕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소’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한가지! 에훗이 에글론에게 공물을 가지고 오는 장면에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공물을 바칠 때에”라고 건조하게 표현해 놓았지만, 히브리어로느 “바야크레브 엣-하민하” וַיַּקְרֵב אֶת־הַמִּנְחָה 라고 읽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상투적인 히브리어 표현으로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 제의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가져갈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자들은 “에글론에게로 공물을 바치러 갔다”는 말을 두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첫번째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의 왕을 마치 신을 떠받들 듯이 섬겼다는 거예요. 아마 이 공물은 모압 왕이 아니라, 모압의 신 그모스에게 주는 선물일 수도 있고요.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신과 그 신의 다스리는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왕이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하는 해석인 거지요. 그렇다면, 에글론 왕을 또는 그모스를 이스라엘의 신인 양 섬기던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일부러 제의에 사용하는 어투를 차용하여 사용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또 하나의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제가 선호하는 설명인데요. 에훗이 마치 살지고 튼실한 송아지를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듯, 에글론(소)을 죽일 것이라는 숨은 뜻을 ‘바야크레브 엣-하민하’라는 말 속에 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에글론 앞에서 주저하던 에훗 VS 에글론을 독대할 구실을 만들려는 에훗

18절은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공물을 바치고 나서는 에글론 있던 왕궁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 길갈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에글론을 죽이겠노라며 호기있기 요단강을 건널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칼을 차고 모압을 갔다 왔지만, 아무것도 바뀌어진 것이 없었던 거예요. 성경에는 이런 에훗의 마음을 녹여 놓은 어떤 표현도 없지만, 호기롭게 요단강을 건넌 에훗의 쳐진 어깨가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요단강을 건너 다시 돌아올 무렾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 에훗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19절).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왜 그곳에서 다시 에글론에게 돌아가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대략 추측해 볼만한 여지는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돌 뜨는 곳’에서 에훗이 다시 에글론에게로 가는데요. ‘돌 뜨는 곳’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프실림’ פְּסִילִים 입니다. 사사기를 연구하는 성서 해석자들중에는 이 지역에 돌을 뜨는 채석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가지는 원래 의미는 ‘신(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돌들’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요단강의 길갈 주변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돌들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나요? 그렇지요.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요단강 물을 쌓이게 하셨고, 마른 땅을 백성들이 건너가면서, 법궤를 메고 있던 제사장들이 서있던 곳에서 열두개의 돌들을 가져와서는 길갈에 세웠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수 4:20). 아마 에훗은 그 돌들을 보았을 겁니다.

“아! 애굽 땅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광야를 떠돌던 우리 조상들은, 군사적인 힘과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때문에 이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와 이 땅을 차지했는데, 우리는 지금 그 하나님 버리고 오히려 모압의 왕, 모압의 신을 섬기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는 상징과 같은 여리고 마저 빼앗겼구나.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기준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이 이렇게 비참하구나. 게다가 호기롭게 몰래 칼을 숨겨 차고 에글론 앞까지는 갔지만, 결국 공물만 바치고 그냥 돌아오는 나는!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아직도 의심하는 이들 중의 하나구나!”

아마, 그 돌들 앞에서 이렇게 자기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게 되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다시 에글론을 찾아갑니다.

또 다르게 이 부분을 설명하는 해석들도 있습니다. 모압 왕을 죽여야 하는데, 뭔가 빌미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곳은 예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성소와 같이 중요한 상징적인 역할을 했던 장소라는 거예요. 그 주변 사회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넌 믿지 못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막강했던 여리고 성의 함락을 모르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기적 같은 요단강을 건넌 이야기와 그 막강한 성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이야기의 증인처럼 서 있는 열두개의 돌들(프실림)은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의 상징이었고, 그 돌들이 있는 곳은 거룩한 장소였을거예요. 에훗이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신탁을 받은 듯 가장을 하고 에글론 왕을 찾아간다면, 혹 에글론 왕이 신하들을 물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길갈 주변까지 갔다가 다시 에글론 왕이 있는 모압 땅으로 돌아가는 치밀한 계획이었다는 이 설명 역시 이 상황을 설명하는 또하나의 선택지입니다.

발을 가리다

길갈에서 돌아온 에훗이 에글론에게 ‘하나님의 은밀한 일’ (히. 드바르 세테르 דְּבַר־סֵ֥תֶר) 을 전해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19절). 히브리어 ‘다바르’라는 말은 ‘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말'(word)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밀한 일’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말'(신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원래의 의미에 충실한 번역인 듯 싶어요. 왜냐하면, 20절에서 에훗이 서늘한 다락방에서 홀로 앉아 있는 에글론을 독대할 때, 에글론에게 한 말이,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였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 (히. 드바르 엘로힘 דְּבַר־אֱלֹהִ֥ים)이라고 번역한 말의 ‘명령’이라는 단어가 앞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밀한 일’의 ‘일’에 해당하는 단어 ‘다바르’이거든요. 그러니, 20절도 “내가 하나님의 말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네요.

이 말을 들으러 에훗 가까이로 오던 에글론을 에훗이 왼손을 뻗어 오른쪽 허벅지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찌릅니다. 에글론의 왼손이 움직였을 때에도 에글론은 아무런 의심이 없었을 거예요. 오른 손이 무기를 잡는 손이지, 왼손은 그런 손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에글론이 몰랐던 사실은, 에훗은 왼손을 오른손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장면이 우리 말 성경에서 에훗을 표현하는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를 ‘왼손잡이’로 번역하는 근거가 된 장면이기도 합니다.

에훗이 나간 후, 에글론이 다락방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신하들은 그가 ‘발을 가리우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표현은 “쉰다” 또는 “낮잠을 잔다”라는 의미일 것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용변을 본다”라는 뜻일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해석들이 이 표현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성경이 전해주고자하는 것은 “발을 가리우신다”라는 뜻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열여덟 해동안 모압왕 에글론을 섬기고,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겠노라며 에글론을 죽였다는 사실이겠지요.

모압사람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싸움에 만 명이 넘는 모압의 군사들은 그저 가랑잎 같은 존재일 뿐이지요. 에훗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전쟁하는 한편, 이들이 퇴각하지 못하도록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지켜섰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압의 용사 약 일만 명이 죽습니다.

에훗의 손

이 짧은 에훗의 이야기에는 ‘손’이라는 히브리어 ‘야드’ (יָד)가 자주 사용됩니다. 왼손을 오른 손처럼 사용하는 양손잡이 에훗(15절), 에훗의 손에 들려가는 에글론에게 바치는 공물(15절), 왼손을 뻗쳐서 칼을 빼는 에훗(21절), 이스라엘의 손에 모압을 넘쳐주신 하나님(28,30절)의 이야기에 ‘손’이라는 히브리어 ‘야드’를 반복합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렇게 에훗의 이야기에서 ‘손’이라는 히브리어 ‘야드’를 반복하는 의도를 직접 성경 속에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지 않을까요? 성경에서는 매우 흔하게 ‘하나님의 손’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상징합니다. 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손에 의지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진 손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한 사람과 민족의 운명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가장 좋은 하나님을 위한 손을 가진 에훗! 에훗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름을 받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선택할 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히. 에후드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 언제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양손잡이) 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03 두번째 사사 에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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