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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7] 다섯번째 사사 기드온-아비멜렉 이야기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7] 다섯번째 사사 기드온-아비멜렉 이야기

❖ 하나님을 잃어버린 기드온

기드온의 가족 이야기는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자기 집에 돌아가서 살았다는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드온을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소개할 때는 항상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삿 8:29에는 성경에서 단 한번 기드온을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라고 부릅니다.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집으로 갔다”(삿 8:29).

자기 집에서 바알 신상과 아세라 신상들을 다 태워버리고, 바알 제단을 전부 다 쓸어버려서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스스로가 바알의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기드온이 이제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은근슬쩍 돌려서 비꼬는 말이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입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게 권력을 잡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서 좋을 것같지만, 그 ‘다 할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이 기드온의 집안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습니다.

기드온에게는 아내가 많았습니다. 그 아내로부터 낳은 아들의 수만 70명입니다. 아들이 70명이니, 딸의 수까지 더한다면, 족히 100명은 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오로지 상상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기드온은 그만한 대식구를 먹여살릴 여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에게 아내가 많고, 아들이 많다는 것은 그가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지도자가 그렇게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은 율법이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신 17:17). 신명기에서는 지도자가 지켜야하는 법령으로 많은 아내를 두는 것과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 모두를 경계하는데, 기드온은 이 두 법을 모두 어긴 셈입니다. 많은 아내들과 아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하나님이 왕된 나라를 세워가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에, 그리고 집안의 재산을 두고 이 아들들이 암투를 벌이는 것이 역사를 돌아보건데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런 법률을 만들어 놓았을 겁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법률을 몰랐거나, 무시하였던 거지요. 더군다나 기드온은 그 많은 아내들도 모자라 첩까지 있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의하는 첩(히. 필레게쉬 פִּלֶגֶשׁ)은 아내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아내(히. 이샤 אִשָּׁה)라는 말은 합법적인 결혼 관계로 맺어진 남녀의 관계이고, 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럼 왜 세겜의 출신의 여인과는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 못했을까요? 세겜의 여인이 공동체 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드온과 결혼한 세겜 출신의 여인이 이스라엘 여인이었다면, 기드온과 결혼을 할 경우, 그냥 ‘아내’가 됩니다. 합법적인 결혼이니까요. 만약 세겜 출신의 여인이 다른 남자의 여자였는데, 기드온이 강제로 빼앗았다면, 불법적인 결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범죄입니다. 둘다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레 20:10). 그러니 이 둘의 경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불법적인 결혼 관계라는 것의 범위가 줄어드는데,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야기 줄거리의 정황에서 보건데, 하나님께서 금지한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기에 적법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고, 그래서 ‘첩’이라 불린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조금 뒤에 다시 또 말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기드온은 적법한 결혼이 아니라 불법적인 이방 여인과의 결혼 관계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기드온이 지어준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은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슬며시 자기의 마음을 집어 넣은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기드온이 외양은 왕이 아니지만, 주변의 나라들의 왕이 그러하듯 정치와 종교를 모두를 틀어잡고 살았기 때문에 실절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이런 기드온의 자신감이었을까요? 그래도 그나마 대견한 것은 끝까지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사 기드온과 그 집안은 이렇게 무너져 내립니다.

❖ 이스라엘이 바알브릿을 신으로 삼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기드온 집안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바알’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바알을 섬기던 기드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뒤에 바알 제단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래서 ‘바알과 싸운 자’ 여룹바알이 되었습니다. 여룹바알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떠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룹바알의 탐욕이 여룹바알을 바알의 자리에 올려 놓았습니다. 바알과 다투던 이가 바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바알브릿을 자기 신으로 삼았습니다. 바알과 언약(히. 베리트 בְּרִית)을 맺고 살게 된 것이지요. 바알을 떠나게 된 것도 여룹바알 덕분이었고, 다시 바알과 언약을 맺게 된 것도 여룹바알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고 그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늘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그 유혹을 이기고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취해서 눈에 보이는 그것들에 만족하며 살아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떠나 어느덧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말입니다. 기드온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라면 더 무섭습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하는 순간, 어느덧 괴물이 되어 버리거든요. 기드온은 자기가 자기 집안과 이스라엘을 올무에 걸려서 넘어뜨리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괴물이 돼버렸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풍요를 보장한다고 꾀는 바알을 따르는 괴물이 돼버렸습니다.

❖ 왜 세겜 여인과?

그렇다면, 기드온이 왜 세겜 여자와 결혼을 한걸까요? 이 질문에 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견을 제시하는데요. 첫번째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지파들인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연합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막강한 힘을 지랑하는 지파 둘을 꼽으라면,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이 둘은 모두가 요셉의 아들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요셉의 아들들이라는 정체성 아래에서 이 둘의 연합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지파의 세겜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가지! 세겜이 에브라임에 속하는지(수 21:21), 아니면 므낫세 지파에 속하는지(수 17:2)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수 16:9와 수17:8에 의하면, 므낫세 자손의 유산 가운데는 에브라임 자손 몫으로 구별된 성읍들과 그 주변의 마을들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세겜의 바로 남쪽에 있는 답부아를 말하며 므낫세의 소유이나 에브라임 자손의 소유라는 점으로보아,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듯한 수 17:2와 수 21:21는 사실 세겜이 므낫세 자손의 유업이나, 에브라임 사람들의 몫으로 구별된 성읍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므낫세 사람 기드온이 세겜에 살고 있는 에브라임 여인과 결혼을 한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가장 영향력이 있는 두 지파가 함께 장악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숨어 있다는 것이 첫번째 견해 입니다.

두 번째는 첫번째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기드온의 입장에서 가나안 땅의 안정을 위해서 일종의 정략적인 결혼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땅의 크기만으로 보았을 때는 므낫세가 제일 큰 지파 인데, 실질적으로 가장 처음으로 손꼽히는 지파는 에브라임이었다는 것이예요. 알다시피, 모세를 이어서 출애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자, 땅 분배를 완성한 지도자는 여호수아입니다. 이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사람이거든요. 사사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뒤의 때이지만, 에브라임 지파가 여전히 힘을 갖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므낫세 지파가 가장 껄끄러워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인 라이벌은 에브라임일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에브라임 여자 중 세겜에 사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둘 간의 갈등을 막고자 하는 예방주사와 같이 말입니다.

세번째는 세겜에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과 결혼 관계를 맺어서 기드온이 이끄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참조. 삿9:28). 위의 첫번째와 두번째 의견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정말 첫번째와 두번째와 같은 의도로 결혼했다면 같은 이스라엘 공동체 지파 간의 합법적인 결혼을 한 셈인데, 그러면 세겜의 여인은 첩이 아니라, 아내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굳이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아내와 첩을 구분한 것은 세겜의 여인이 다른 아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 다름은 이 세겜 여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생활 40년동안 물질 문화라는 것을 만들거나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한 자리에 정착하면서 문화와 문명을 일구어냈던 가나안 사람들에 비해서, 유랑 생활 40년의 히브리인들이 누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문명은 질적으로 가나안의 것들과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들보다 더 멋진 문명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세겜과 결혼을 매개로 정치적인 동맹을 맺고, 그 안에서 평안한 삶을 추구하려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한 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직접 경험한 사사입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런 믿음이 기드온에게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과 300명을 이끌고 미디안과 싸우는 전장터에 나갈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이제 기드온은 하나님이 인도자 되신다는 생각보다는 자기가 이웃 나라의 왕들이 그런 것처럼 이스라엘을 인도하려고 했습니다. 의사결정의 맨 꼭대기에, 하나님을 향한 제의의 맨 꼭대기에 자기가 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이 세겜 여인과의 결혼하였다는 사실과,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기드온이 더이상 하나님을 주인 삼아 살지 않게 되었다는 그의 민낯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사사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국내외 관계에서 안전을 보장 받으려는 정치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이 세겜의 여인으로부터 낳은 아들, 아비멜렉이 기드온 집안의 역사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의 큰 재앙이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 아비멜렉의 연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세겜으로 갑니다. 그곳은 외가 친척들이 있는 곳이예요. 그 곳에 가서는 친족들을 선동합니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 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 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 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들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삿 9:2).

이 구절에서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히브리어 ‘콜 바알레 쉐켐’ כָל־בַּעֲלֵי שְׁכֶם 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또 익숙한 단어가 여기에 등장하지요? ‘바알’ 말입니다. ‘콜 바알레 쉐켐’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세겜에서 힘 좀 쓰는 모든 사람들’ 또는 ‘세겜의 유력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세겜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만큼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 모아 놓고서는 아버지 기드온의 자리를 차지하려니 내 편에 서서 나를 좀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사사기의 기드온 이야기에서는 유독 ‘바알’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그 이름의 아이러니를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 구절 한 절에는 두가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 줍니다.

첫번째는 여룹바알의 아들 70명과 아비멜렉이 가족 안에서 신분이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이라는 말에 아비멜렉 자신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12 지파가 연합해서 하나가 된 공동체 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형제인 셈이지요. 그런데 아비멜렉은 자기가 세겜에 사는 가나안 여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 세습 서열에 들어가지 않았나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뒤에 말하는 것처럼 혈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세겜을 찾아와서 자기 어머니와 결혼을 할 때에는 다 정치적인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혼으로 기드온은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는 합법적인 결혼이 아니었기에 아비멜렉의 어머니와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첩’과 ‘첩이 낳은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세겜 지역의 대단한 유력자의 딸이고, 기드온도 무시하지 못하는 힘을 가진 여자인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로 기드온이 죽은 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권위를 계승하는 후보조차 들지 못했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버지 기드온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로지 필요를 위해서 어머니를 이용했구나. 힘이 필요할 때는 세겜으로 찾아와서 어머니와 결혼하고, 세겜 사람들을 마치 가족 대하듯이 친절하게 굴더니만,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서는 내가 세겜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하는구나.” 그래서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간 것입니다. 외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거지요.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두번째는 말만 사사였지, 기드온은 스스로 왕처럼 행세했다는 것입니다. 사사는 세습이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웃 나라의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이 부르는 그 이가 이스라엘의 의사결정의 최고 자리에서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옷니엘이라고 그 아들이 사사가 되지 않았고, 어머니가 드보라 였다고 그 아들이 사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죽고 난 다음에는 그 아들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선출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택’으로 말이지요. 이것은 이미 기드온의 시대에 기드온이 왕으로 불리지 않았을 뿐, 모두가 그를 왕처럼 생각했고, 또 기드온도 스스로 왕처럼 굴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모든 징조가 기드온의 시대에 싹을 틔웠으니, 누구를 탓할 일도 없습니다.

❖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다-바알을 위해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말에 마음이 기울어졌습니다. 어차피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이 서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머리가 되고자 치고박고 싸우는데, 이 틈새에 자기들과 피를 섞은 아비멜렉을 후원해서 그가 왕위에 오르면, 가나안 땅에서 세겜 사람들의 영향력이 더 강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섬기던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냥을 꺼내서 아비멜렉에게 주었습니다. 이 행동에 깔려있는 숨은 뜻은 아마도,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우리는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이잖아. 그들와 우리들은 달라. 그런 입장에서 너(아비멜렉)는 우리와 형제인 것이 분명하지. 너의 어머니를 우리가 알고 있고, 그 집안이 이 곳에서 우리와 함께 바알을 섬기고 있는걸? 그러니 우리는 형제야. 바알이 우리의 관계를 확증하지. 우리는 ‘바알 앞에서 언약을 맺은 관계'(바알브릿)이니까. 우리가 싸울 적은 여호와를 섬기는 저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두자.” 는 것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바알을 따랐습니다. 아버지 여룹바알이 보여준 그 가정의 모습은 이미 하나님의 눈에서 너무나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여룹바알은 권력을 즐겼고, 소유에 집착하였고, 하나님마저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의 정체적인 계산으로 아비멜렉이 태어났습니다. 그런 아비멜렉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은 바울과의 싸움(여룹바알)이 아니라, 바알과의 타협이었고, 스스로 바알이 되는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아이러니한 기드온 집안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집안을 대표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싸움은 너무 싱겁게 아비멜렉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아비멜렉은 은 70으로 건달과 불량배를 고용해서 기드온의 아들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습니다. 70냥으로 70명의 아들들을 죽였다고 하니, 아마 암살자나 살인을 부탁한 사람들에게 기드온의 아들 한 명당 은 1냥을 지불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행히도 막내 아들 요담은 숨어서 목숨을 건졌으니, 살인청부업자 중 한 명은 실패한 셈이지만, 누가 뭐라해도 아비멜렉의 일방적인 승리입니다.

이 승리의 장소가 ‘바위’라는 것이 매우 마음을 껄끄럽게 합니다. 아비멜렉과 그가 고용한 이들이 기드온의 집이 있는 오브라에 가서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는데, 한 바위 위에서 죽였다고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바위라든가, 큰 나무라든가 아니면 뭔가 세워진 기둥이라든가. 이게 전부다 신의 임재의 상징이거나, 신이 거주하는 거룩한 장소, 내지는 신과 연결될 수 있는 제의 장소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바위 에서 죽였다는 표현은 마치 아비멜렉이 섬기는 바알 신에게 사람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희생제물로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요 사람이 희생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바위에서 기드온의 아들들 69명이 죽었다고 보도하는 이 이야기에는 아들들을 죽였다는 객관적인 사실 전달 이외에, 그냥 죽인게 아니라 마치 바알에게 제사 드리듯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들을 죽였다라고 이해할 여지가 있는 거예요.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바알을 따르는 세겜 사람들과 더 확고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서 이런 종교적인 상징이 내포된 살인을 저지른 것일 수도 있겠구요. 또 한편으로는 아비멜렉이 숭상하는 바알(정치권력)을 위해 그들을 한 바위에서 죽였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네요.

❖ 약속을 잊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다

세겜 성읍의 사람들이 세겜에 있는 돌기둥 곁의 상수리 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삿 9:6).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부분을 기가 막히게 극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단 한절 안에 정말 많은 역설적인 역사 이야기들을 심어 놓았거든요.

비록 아비멜렉이 세겜의 토박이 가나안 여인의 아들이라고 해서 세겜 사람들이 모두다 토박이 가나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겜은 정복 전쟁 직후,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성읍이었고, 또 도피성으로 사용된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들, 그 중에서 레위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겜 사람들과 뜻을 같이해서 그들처럼 살았던 모양입니다. 조금 지나친 상상을 해본다면, 그들을 위해서 살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레위인들의 성읍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의를 드리기 위해서 가까운 레위인들의 성읍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겜에 또 다른 제단, 바알브릿을 위한 제단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럼, 세겜에 제단이 두 개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서 바알에게도 제사를 드렸다는 말일까요? 고고학자들이 세겜(Tel Balata)에서 동시대에 만들어진 제단을 하나 밖에 찾지 못했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서 바알에게도 제사를 드렸었고, 그 제사에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방조했거나, 동조했거나, 또는 앞장섰다는 막장 상상이 가능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이고, 레위인이라고 말하지만, 세겜에 살면서 토박이 가나안 사람들과 별다름 없이, 그리고 바알을 섬기던 이들과 별다름 없이 문명이 주는 풍요에 안주하며 누리고 살았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황망할 따름입니다.

세겜은 여호수아의 숨결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 재판관들을 불러내서는 아브라함 이래로 이스라엘의 역사의 이야기를 쭉 읊고, 출애굽의 역사를 다시 되새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주님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들이 주님을 저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그는 당신들에게 대항하여 돌아서서, 재앙을 내리시고, 당신들에게 좋게 대하신 뒤에라도 당신들을 멸망시키시고 말 것입니다.”(수 24:19-20)

그러자 백성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수 24:21,24)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예수님 앞에서 절대로 예수님을 모른척하지 않겠노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베드로가 생각이 납니다. 하여간에, 그리고 난 다음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고, 그들이 지킬 율례를 법도를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주님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 나무 아래에 두고서는

“보십시오,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때에, 이 돌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못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수24:27)

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왕처럼 섬기겠다고 맹세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결탁한 세겜 사람들과 함께 그 돌기둥과 그 상수리 나무로 가서는 바알을 섬기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눈에는 단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건조한 기록 뒤에,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를 숨겨 놓고서는 사사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깊고 큰 한숨을 내뱉도록 하게 한 것입니다.

 

❖ 요담의 연설, 나무의 비유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외쳤습니다. 구약 성경에 이렇게 재미있고, 찰진 비유도 흔하지 않습니다. 감람(올리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에게 찾아가서 나무들이 왕으로 세우려는 이야기입니다. 감람나무는 풍성한 기름을 내는 자기 본연의 일이 있다고 사양했고요. 무화과 나무도 달고 맛난 과일을 맺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거절합니다. 포도나무도 마찬가지예요. 포도주를 내는 일이 자기 일입니다. 어떻게 내가 다른 나무 위에 날뛸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덥석 나무들의 제안을 받아요. 가시나무가 무슨 그늘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데 모든 나무들은 반드시 자기 그늘 아래로 와서 피해야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어기면, 가시나무와는 견주어 감히 그 가치를 셈할 수도 없는 백향목 마저도 불 살라라 버리겠다고 겁박을 하는 거예요. 중세의 랍비인 라쉬(רש”י)는 이 네 개의 나무의 비유를 참 재미있게 해석했습니다. 라쉬는 감람나무가 첫번째 사사인 옷니엘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렘 11:16에 보면, 예레미야가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달린 감람 나무’였던 유다의 암울한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감람나무를 유다에 비유하고, 유다 지파 출신의 사사가 옷니엘이기 때문에 감람나무를 옷니엘을 가리키는 비유로 이해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사사 드보라를 비유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무화과 나무 열매는 종려나무 열매와 함께 고대에 꿀 대용으로 사용되던 과일입니다. 두 나무의 열매가 매우 달고, 말려서 보관하기가 좋아서 두고 두고 당을 섭취하기에 좋은 열매들이거든요. 라쉬는 무화과가 ‘나의 단것’ 이야기 하는데(삿 9:11), 이것을 무화과 나무의 ‘꿀’이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꿀은 곧 꿀벌을 연상시키지요. 꿀벌이 달달한 꿀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도 하려니와, 또 그 꿀벌이 꿀을 만들어 내니까요. 드보라라는 이름의 뜻이 ‘꿀벌’입니다. 그래서 라쉬는 무화과 나무가 사사 드보라를 비유한다고 설명합니다. 포도나무는 사사 기드온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습니다. 창 49:22에서는 요셉을 이야기하면서 샘곁에서 담장을 넘어 뻗은 무성한 나뭇가지와 그 열매를 노래하는데요. 창세기 탈굼 옹켈로스(Targum Onqelos)에서는 이 나무가 포도나무라고 해석하여 번역해 놓았습니다. 요셉의 아들들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인데요. 므낫세 지파 출신의 사사가 기드온입니다.

라쉬의 비유 해석을 근거로 이 책의 맥락을 따라가면, 요담의 연설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 너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구원자들을 보아라! 옷니엘이 왕이 되려고 했던가? 그는 갈렙의 사위이면서 유다를 넘어 이스라엘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문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할 일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지 스스로 영화로운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오로지 하나님 만이 이스라엘의 힘이고 왕이 아니었던가? 드보라를 보라! 드보라는 통념을 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여자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고, 남자이면서 용사였던 바락도 두려워하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여자 장군이기도 했다. 꿀벌처럼 작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놀랍고 위대한 일을 해냈던 드보라는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에 그 녀가 우쭐댈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 기드온을 보아라! 그는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 찍어버렸다. 비록 그의 말년은 너무나 많이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이 왕되심을 잊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전통의 텃밭 때문에 차마 스스로 ‘왕’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너는 스스로 왕이 되어서 너보다다 더 찬란한 백향목같은 이스라엘을 불로 살라 없애려고 하느냐?”

요담의 외침 속에서 그 불이 겉잡을 수 없게 되어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세겜과 밀로의 집안(세겜 주변에 든든한 망대와 요새에 거주하며 살던 가문들), 그리고 아비멜렉 자신을 모두를 태워버릴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는 겁니다. 아쉽게도 그 후 요담이 브엘로 몸을 피하였는데요.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요담이 그 다음에 기드온을 이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의 자리에 서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관심 사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사의 자리는 내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요담의 예언자적인 비유가 아비멜렉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역사를 다시 기억나게 해주는 장한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요담이 사사가 되는것도, 선지자나 재판관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래서 요담은 이 비장한 연설을 한 다음에 아비멜렉의 이야기에서 쏙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 요담의 연설의 실현-‘권력을 얻고자 하는 욕구’라는 괴물

‘권력을 얻고자 하는 욕구’라는 괴물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무시 무시한 녀석입니다. 그리고 이 괴물에게는 도덕적인 감수성이라든가 자비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 하나를 먹고 나면, 점점 더 큰 것을 먹고 싶어하는 괴물이기도 하지요. 거대한 욕망의 괴물이요. 아비멜렉을 도와서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인 세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권력을 얻고 힘을 가지게 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의 제일 가운데 자리에 앉게 되니, 이제는 자기들이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자기들이 선택한 아비멜렉이 왕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을 세울 수도 있고, 자기들이 그 자리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 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는 ‘권력을 얻고자 하는 욕구’라는 괴물입니다.

그런데, 세겜에 세겜 사람들이 딱 마음에 들어하는 인물이 흘러 들어 왔습니다. 가알이라는 사람인데요. 이 가알이 누군지에 대해서 성경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을 지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사사기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이 가알이 무역상일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무역상들을 그냥 장사하는 사람들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닐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약탈 당할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무장도 하고 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또 조금더 가치있는 것들을 운반할 때에는 고용한 군인들과 함께 다녔습니다. 무리를 지어서 다니며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거지요. 그래서 이런 무역상들을 ‘대상(隊商)’이라고도 부르는 겁니다. 물물교환을 통한 장사나, 값어치 있는 물건을 받으며 거래하면서 이윤을 냅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가서 장사를 하다보면, 도시의 상태를 파악할 수가 있어요. “아 이 도시는 아주 잘 갖춰진 도시구나.” “이 도시는 참 허술 하구나.” “이 도시 사람들은 지금 이 도시의 삶에 무척 만족하고 있구나”. “이 도시 사람들은 자기네 지도자들에 불만이 많구나.” 이런 것들 알수가 있거든요. 이렇게 이 도시 저도시를 다니면서, 한 도시­, (예전에는 한 개의 도시가 한 개의 나라일 수도 있으니)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상황을 꿰뚫고 다녔던 사람들이 무역상들입니다. 이런 첩보들을 쌓아가고, 군사적인 힘을 키워가다가 도시 자체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 도시의 주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광야의 바이킹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런 대표적인 민족들이 미디안 사람들이나, 아말렉 사람들입니다.

그런 가알이 세겜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우리 세겜 성읍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왜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겨야 합니까?” 여기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가알이 세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슬쩍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가 토박이였다가 대상 일로 이곳 저곳을 유랑하던 끝에 다시 세겜으로 돌아와서 정착한 것인지, 아니면 미디안이나 아말렉의 대상들이 그러하듯이 세겜을 점령하기 위해서 동질감 있는 단어인 ‘우리’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득의 방법은 놀랍게도 3000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남인가?” 하는 지역색과 혈연, 그리고 잔치를 베풀며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환심을 사고는 뇌물입니다(삿 9:27).

“우리 세겜 성읍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왜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겨야 합니까? 도대체 아비멜렉이 누굽니까? 여룹바알의 아들입니다! 스불은 그가 임명한 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를 섬겨야 합니까? 여룹바알과 그의 심복 스불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겨야 합니까? 나에게 이 백성을 통솔할 권한을 준다면, 아비멜렉을 몰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나오라고 해서 싸움을 걸겠습니다.” (삿 9:28-29)

처음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선동할 때, 기드온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인데 비해서, 자신은 세겜 사람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심리적으로 자신이 세겜 사람들에게 더 가깝다는 것이지요. 세겜 사람들은 그 말에 끌렸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사용한 방법을 가알이 그대로 다시 사용하는 거예요. 아비멜렉은 혈통으로 따지면, 반만 세겜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사람이지요. 그런데, 가알은 순수한 세겜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가 그를 섬겨야 합니까? 여룹바알과 그의 심복 스불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겨야 합니까?”라는 말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함부로 우리를 대하지 못하던 그 시대의 영광을 다시 되찾자라는 말과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반은 이스라엘 사람인 아비멜렉이 아니라, 순수한 세겜 사람인 자신, 또는 이스라엘에 물들지 않은 자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계략으로 하나님의 힘을 자신들의 권력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알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지역의 산들에 곳곳에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원래부터 하던 일이니 어렵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렇게 약탈을 하면서 점점 사람들 사이에 아비멜렉이 자기의 영토도 다스릴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민심의 불안과 불만을 불러일으킬 작정이었던 거예요. 지금 불안정한 치안의 뒷배에 가알이 있고, 가알이 가진 의도를 알게 된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가알과 일전을 준비합니다. 매복 공격에 당한 가알과 세겜의 주민들은 세겜 망대로 들어가 방어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불을 놓아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세겜 망대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동족들이었고(물론 가알의 말대로 절반만이었지만), 친족들이었고, 같은 바알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완전히 진멸하다 시피합니다. 아비멜렉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왕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다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지요. 또,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치뤄야할 대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 ‘아비멜렉’의 위대한 이름을 이름 모를 여인이 지우다

아비멜렉은 자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는 무자비함이 통치의 원칙이었습니다. 공포 정치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아비멜렉은 데베스까지 쫓아가서 가알과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 뒤에 아비멜렉은 데베스로 갔다. 그는 데베스에 진을 치고, 그 곳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그 성읍 안에는 견고한 망대가 하나 있어서, 남녀 할 것 없이 온 성읍 사람들이 그 곳으로 도망하여, 성문을 걸어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갔다. 아비멜렉은 그 망대에 이르러 공격에 나섰고, 망대 문에 바짝 다가가서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에 내리던져, 그의 두개골을 부숴 버렸다. 아비멜렉은 자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젊은 병사를 급히 불러, 그에게 지시하였다. “네 칼을 뽑아 나를 죽여라! 사람들이 나를 두고, 여인이 그를 죽였다는 말을 할까 두렵다.” 그 젊은 병사가 아비멜렉을 찌르니, 그가 죽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저마다 자기가 사는 곳으로 떠나갔다.”(삿 9:50-55)

세겜에서 이미 망대에 들어간 사람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지를 터득한 아비멜렉은 세겜에서처럼 데베스의 망대에 불을 놓으려고 망대 문 바짝 다가섰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이 때마침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에 내리 던진거예요. 그리고 그 돌에 맞은 아비멜렉은 두개골이 부서져버렸습니다.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아비멜렉이,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돌에 맞이 좋은 것입니다. 청동이나 철로된 창, 화살, 이런 엄청난 무기가 아니라, 그냥 집에서 콩 갈고, 밀 갈고 하던 맷돌 윗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 보도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권력을 잡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왕이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 이야기를 기드온 뒤에 소개하면서, 이제 사사 조차도 왕처럼 살려고 하던 유혹의 시대의 비극을 그려주었습니다. 마치 이름 높은 장군 시스라가 야엘의 장막에서 여인의 손에 죽었듯이, 마치 다볼산의 놀라운 전쟁 승리의 터에 ‘번개’라는 웅장한 이름의 바락이 앞장 서지 못하고, 드보라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처럼, 권력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서서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사람이 겪게될 미래를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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