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holinesscode@me.com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2] 미가의 집에서 생긴 일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2] 미가의 집에서 생긴 일

❖ 사사기를 감싸는 보따리의 뒷 부분
처음에도 말했던 것처럼 사사기라는 보따리의 내용물이 사사들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보따리로 다시 나옵니다. 17장부터는 이제까지 말했던 사사들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묶어냅니다. 사사기 3장부터 16장까지의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사결정권을 가진 지도자들이 점점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오면서 브레이크 없이 계속 바닥으로 가속도를 내며 내려가는 형세였습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으셨으면 성경의 그 모든 사사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름 없는 개인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시고 부르심으로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사사의 삶이 바뀌었고, 그 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처음 사사들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사 기드온 이후로 사사들의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었던 사사가 왕이 되려고 욕심을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사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사결정의 최고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맛보자 더 큰 권력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고, 그 위치를 이용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부(富)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자녀를 통해 그 권력과 부를 대물림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종교의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욕심을 내기도 했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탐욕으로 왕이 되려고 하였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었으나, 지도자의 자리에서 맛본 권력이 마음 속에 있던 탐욕을 부추겼고, 결국에는 자기 힘으로 왕이 되려던 사사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려던 사사들의 역사를 고발하는 이야기가 사사기 3장부터 16장까지의 사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치, 군사, 경제의 지도자 뿐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이끌어가는 종교 지도자들의 삶도 함께 무너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눈에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은 사사들의 타락 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요즈음 시쳇말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역사에서 목격한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은 이스라엘 공동체 타락의 ‘끝판 왕’이었습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는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의 양태마저도 바꾸었습니다. 자기들의 부를 축적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던 종교 지도자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 마음대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대
에브라임 산간지방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미가의 집은 매우 부유했던 가정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집에 은 천백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야기에 미가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미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나 봅니다. 범인을 잡을 길 없는 미가의 어머니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그 도둑을 저주했습니다. 이 저주를 미가가 들었습니다. 저주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저주가 꽤나 무서웠었나 봐요. 저주의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정말 그 일이 자기에게 벌어질까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말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은돈 천백 냥을 훔쳐 갔을 때에, 어머니는 그 훔친 사람을 저주하셨습니다. 나도 이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은돈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가져 갔습니다.”(삿 17:2)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지요. 돈을 잃어버려서 분에 못이길 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저주를 말하다가도, 정작 그 저주가 내 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 그 저주가 복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재빨리 저주의 말을 거두어 들입니다.
“얘야, 주님께서 너에게 복 주시기를 바란다.”(삿 17:2)
그러나, 이 대화를 단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만 보기에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굳이 왜 이 이야기로 종교의 타락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시작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와 앞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잘 보면 역사가의 의도를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인용되기는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 습관에서 들먹이는 신의 이름 중에 하나이거나, 문화일 뿐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고발하는 또하나의 사회 현상은 이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내 의지대로 움직이려고 하였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의 욕구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겼던 시대에는 누군가가 내게 경제적인 손실을 입히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저주를 퍼부을 수도 있었고,  또 그 누군가가 나와 관계된 인물이라면 언제라도 내가 쏟아 놓았던 저주를 하나님께서 복으로 바꾸어 주길 요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들인 사사들도 그랬는데, 그 백성들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미가가 훔쳐갔던 어머니의 돈 은 천 백을 다시 돌려주니, 미가의 어머니가 일종의 액땜을 합니다. 아들인 미가가 저주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요량으로 그 돈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받고 마음을 풀라는 이야기이지요. 여기까지 읽다보면 이 미가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말인가?’하는 마음에서 말이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본 사사 시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입니다(잠 17:8).
    거기에다가 한술 더 뜹니다. 그 은돈으로 신상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만든 신상을 히브리어 성경에는 ‘페셀’ פֶּסֶל 과 ‘마쎄카’ מַסֵּכָה 라고 합니다. 십계명에서 만들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두번째 계명에서 말씀하신 형상이 ‘페셀’입니다. 그리고 시내산 아래에서 만든 황금 송아지가 ‘마쎄카’입니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금령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의 형상을 소유하는 자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면 안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사사들의 시대에 이미 이 십계명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 이미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여호와 앞에 두지 말라”(출 20:3; 신 5:7)라는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 마저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삶에서 지워진지 오래이구요. 결국 미가의 어머니가 마음대로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신상을 부어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내 마음의 탐욕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는 거예요.
❖ 재력가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부리는 시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미 ‘돈을 가진 자가 사회와 하나님을 움직이는 시대’가 되어 버린 사사 시대를 이렇게 고발합니다. 앞서 미가의 어머니가 잃어버린 돈이 은 천백이라고 했습니다. 이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감이 잘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신당에 제사장을 고용하는데, 그 제사장의 일년 연봉이 은 열이었습니다. 그냥 산술적으로 계산하자면, 그 제사장의 110년치 연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엄청난 재력가에게는 개인 전용 ‘하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워줄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 신상이 머물 집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신당’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만, 아마 이 번역은 성경을 읽는 교인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단어를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집'(히. 베트 엘로힘 בֵּית אֱלֹהִים)이라고 써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하는 장소가 ‘하나님의 집’이며, 성막과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삿 18:31). 그러나 그 집에 하나님을 가두고, 그 집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하나님을 개인이 소유하면서, 내가 원하는대로 내 삶을 윤택하게 해줄 하나님을 기대할 때, 그 하나님의 형상은 우상이되고, 그 ‘하나님의 집’은 ‘우상의 집’, ‘우상 숭배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소굴에는 격에 맞추기 위해서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제사장이 없었나 봅니다. 아니, 그 마을에 제사장이 있었던 들, 제사장이 한 개인의 집에 고용되어서 고용주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아니었을테니(이쯤 되면,  제발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미가는 개인 맞춤형(?) 제사장을 세워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제사장이 입을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빔도 만들었네요!(삿 17:5) 이 정도 되면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너무나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겨 놓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두고서는, 그 하나님과 함께 드라빔을 두는 장소가 사사 시대의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미 이런 장소가 되어 버렸는데, 그 곳에 제사장을 세워서 아침 저녁으로 제의를 드린들 이미 그 제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제사가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집’도 만들어 놓았고,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었고, 제사장이 입을 에봇도 만들어 놓았지만, 이것을 입고 미가 집안의 번영을 위한 기복의 제의를 드려줄 제사장이 없자,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레위인 가운데에도 아론의 아들들만 될 수 있는 제사장의 자리를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한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스스로 차지한 것입니다. 어차피 그 ‘하나님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아니고, 그 신상이 하나님도 아니니, 제사장을 누군 세운들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은, 이것이 사사들이 살던 시대입니다. 이정도면,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닥의 인생, 바닥의 신앙을 살던 사람들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 청년?
유다 지파에 속한 유다 땅 베들레헴에 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레위 사람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자기가 살던 베들레헴을 떠나서 있을 곳을 찾다가, 에브라임 산간지방까지 와서, 미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삿 17:7).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구절이지만,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레위 청년의 출신지를 굳이 밝혀 주면서 레위 사람들을 넌지시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 가운데에서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처럼 커다란 덩어리의 땅을 분배 받지 못한 지파입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돌아온 몫은 마흔 여덟개의 성읍과 그 주변의 땅입니다(수 21). 레위 사람들이 받은 성읍은 매우 독특해서 한 장소에 모여 있지 않고, 각 지파의 땅에 몇개씩 성읍이 할당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골고루 성읍을 흩어 놓은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제사의 법을 따르자면, 피와 기름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를 땅에 함부로 흘리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고기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을 죽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곳에 가서 제사장의 인도 아래에서 죽여야 합니다. 이 살생이 죽이는 동물을 온당하지 않은 않은 이유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육류 섭취는 불법적인 살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이렇게 사람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물을 죽일 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그리고 하나님께 그 죽임의 의미를 먼저 알리는 것이 화목제사입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이 어느 땅 한곳에 모여산다면, 그 땅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파의 사람들은 고기 한번 먹겠다고 온 가족이 양을 데리고 며칠 길을 와야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의 곳곳에 레위인들의 성읍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제단을 만들고 그 지파의 사람들이 가까운 거리의 제단에서 먼저 화목제사를 드리고 육류를 섭취하거나, 제의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레위인들의 도시 목록에 베들레헴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유다 땅 베들레헴에 사는 레위 사람인데, 살 곳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삿 17:9)라는 대답에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숨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레위인들 가운데에서도 아론의 직계 중에서 맏아들 계열이 아니었다면, 레위인들은 풍요롭지 않았습니다. 레위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영역에서의 권력이 꼭 경제적인 부요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레위기에서 정한 제사의 법률들 가운데에서 제사를 드린 후,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소제와 화목제 뿐이었습니다(레 1,2,6,7).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동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그 제사 자체가 많은 양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예요. 그리고 화목제는 가슴살과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의 몫으로 주는데, 얼마나 많은 화목제사가 드려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대 사회는 육식 사회가 아니라, 빵과 유제품이 주식인 사회였기 때문에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제사장들을 먹여 살릴 만한 양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제사는 한 가정이 함께 드립니다. 한 가정에 남자 10명이 있다손 치더라도 제사는 한 마리를 드립니다. 자발적으로 두 마리,  세 마리를 드릴 수는 있지만,  원칙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인구의 수가 늘어나면 분명히 제사의 수도 늘어나겠지만,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레위인들의 인구 수는 늘어나는 제사의 수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레위인들이 제사를 통해서 받은 것 만으로는 풍요로울 수 없습니다. 레위인이 받은 도시 주변의 땅도 받았기에 레위인들이 알아서 그 땅을 개간해서 먹고 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레위인의 땅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레위인들의 도시도 아닌 베들레헴에 레위인 젊은이가 살고 있었는지 슬쩍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습니다. 매우 불경스러운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이것 만큼 이 상황을 잘 묘사해주는 단어가 없기에 사용합니다. “시장개척!”
    유다 땅의 아홉개 성에는 이제 레위인들이 차고 넘치거든요. 그곳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고기 몇조각 빵 몇개를 얻기도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레위인이 거주하는 도시가 아니어서 제단이 없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제단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의 입장에서 너무 좋지요. 이제는 더이상 화목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가까운 아나돗이나 헤브론과 같은 도시를 찾아갈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레위인들의 필요와 베들레헴 사람의 편의가 서로 맞아 떨어지면 그만이었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삶도 만만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새로운 시장 개척의 소식이 레위인들 사이에 돌자 또다른 레위인들이 베들레헴에 모여들었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베들레헴의 레위인 인구가 늘어났고, 그 가운데에서 시장(?)에서 도태되었던지, 아니면 더이상 큰 부를 그곳에서 누릴 수 없어서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서 다시 길을 떠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곳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온 것이지요.  에브라임 산지가 목적지도 아니었습니다. 살 곳을 찾아, 새로운 시장을 찾아 정처없이 떠나는 길이었으니까요.
❖ 경제 권력과 종교 권력의 콜라보
미가의 제안은 매우 솔깃했습니다. 제사장을 시켜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봉도 어김없이 주겠답니다. 그리고 한 집안의 아버지로 대우하겠답니다(삿 17:10-13). 레위인 가운데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론의 아들들로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청년이 아론 계열의 레위인인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미가’ 본인이 그 젊은이를 제사장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매우 불편합니다. 율법에서는 제사를 드린 후,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몫이 일정치 않습니다. 레위인으로 살면서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레위인들의 수가 점점 많아져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도 나의 몫으로 들어오는 것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가는 일정한 연봉을 제시 한 것입니다. 이제는 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올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죠. 미가의 이 제안은 레위인의 경제사정을 고려해서 배려해 준 자비로운 행동이 아닙니다. 제사장을 사유화하고, 개인 비서와 같은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편하게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편하게 ‘이용’하겠다는 너무나 불순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매우 불신앙적인 제안입니다. 미가와 미가의 집에 안주하겠다는 이 레위인 청년에 대한 분노가, “그 젊은 레위 사람은 미가와 함께 살기로 하고, 미가의 친아들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다”(삿 17:11)에 다다르면, “가족같이 함께 일하실 분 구함”이라는 아르바이트 구하는 광고를 보는 것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마음은 얼마나 더 했겠습니까!
    사족같은 말이지만,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미가가 이 레위 청년을 아들같이 대했다는 것도 미가가 제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 이 레위인 청년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삼을 때에 했던 부탁은  “우리 집에 살면서, 어른이 되어 주시고, 제사장이 되어 주십시오.”(삿 17:10)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서 말씀을 전달하시니, 나이와 관계없이 제사장의 말과 하나님의 뜻을 어른 섬기듯 따르고 섬기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고용하고 나서는 아들처럼 대했다는 것은 이제 이 제사장이 하나님을 말을 전하는 집안의 어른이 아니라, 아버지 미가의 말을 잘 따르고 순종하며 미가의 의중을 하나님에게 전하고, 아버지 미가가 흡족하도록 살아가는 아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보았던 이 시대, 그리고 반복해서 고발하는 이 시대는 권력을 가지고, 돈을 가진 이들이 자기들을 위한 전속 제사장을 보유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빌미삼아 내가 가지고 싶은 것과 이루고 싶은 것들을 빌던 시대였고,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였습니다. 사사들이나, 종교의 지도자들인 레위인들이나, 사회의 지도자라 불릴 만큼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어느 누구하나 예외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모두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사회의 어둡고 추한 시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사사기 17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 단 지파의 이주(1)-정탐꾼과 레위 청년의 만남 
삼손의 죽음이 해피엔딩이 아니었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삼손 이전까지 사사들 가운데에서 긴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사들은 일시적으로나마 그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사 중에서 적들과의 대치 상황에서 죽은 사사도 처음이자 마지막 이려니와, 삼손이 죽은 후에 단 지파는 그나마 살고 있던 그 땅에서조차 살 수 없게 되어서 살 곳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번역을 하나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삿 18:1인데요. “그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였음이라”라고 우리 말 성경 개역개정판은 번역했습니다. 새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지파는 이스라엘의 지파들 가운데서 아직 그들이 유산으로 받을 땅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자리잡고 살 땅을 찾고 있었다”라는 번역은 마치 아직까지 단 지파가 땅을 분배 받지 못한 상태라고 오해하게 만듭니다. 이미 여호수아가 땅의 분배를 마치고 땅을 차지할 수명을 각 지파에게 주었고(수 19:40-48), 다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자기 땅에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삿 18:1의 해당 구절을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때 단 지파는 거주할 유업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기업에 관한한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에서 (단지파는) 그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땅이라는 유산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빈 땅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땅의 분배는 사명의 분배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사명을 분배해준거에요.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편만하게 흐르도록 하게하는 그 사명. 그래서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 사명에 따라서 땅들을 잘 정복해 나아갔어요. 그런데 아직 단 지파사람들은 그때까지 유업에 살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 사명을 제대로 실현해내지 못하고 있는거지요. 그러니,  이 성경 구절을 읽고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미가의 집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다섯 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살만한 곳을 살피던 중, 이 정탐꾼이 우연찮게 미가의 집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어?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집에서 제사장 일을 하고 있는 레위인 청년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었습니다. 얼굴을 볼 필요도 없었나 봅니다. 목소리만 듣고도 딱 그 사람인줄 알았다고 하네요. 이걸 그냥 참 기묘한 인연이라고 슬쩍 지나가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의도를 지나치는 것입니다.
    레위인 청년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누군인지를 알았더라면, 분명히 서로 아주 잘 알고 있던 사이였을 것입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관계말이지요. 그런데 이 레위인 청년이 살던 지역은 베들레헴이예요. 물론 나중에 에브라임 산지로 이주하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과거는 이사가 자유로운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서로 알고 있었을까요?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로 이 레위인 청년이 단 지파 땅에도 가본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시장 개척을 위해서라면, 베들레헴 뿐 아니라 단 지파의 어느 곳이라고 가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곳에서 오랜 동안 제사장 일을 하거나, 레위인의 일을 했기 때문에 단 지파의 정탐꾼들이 이 청년의 목소리를 알아 들은 것이 아닐까요?
    두번째는 이 청년이 원래 단 지파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에 살던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단 지파의 땅에는 엘드게와 깁브돈, 아얄론과 가드 림몬이라는 레위인의 성읍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얄론을 제외한 세 개의 성읍은 실질적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영토 안에 있었기 때문에 분배는 받았지만, 살아보지 못했을 성읍입니다. 그렇다면, 단 지파에 할당된 레위 사람들 그핫 자손들은 아얄론에 모여 살아야했는데, 성읍의 크기에 비해서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 셈이 되지요. 성읍에 비해서 제사장의 수가 많다보니, 원만한 제사 몇번으로는 그 성읍에 사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살아가기 힘이 들었을 겁니다. 그 청년은 그래서 떠났을 수 있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단 지파의 재앙이 도미노처럼 단 지파 뿐 아니라, 그 안에 함께 살던 레위 지파의 사람들까지 무너뜨리고, 레위 사람의 가장 세상적인 가치 추구가 도미노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무너뜨렸습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율법은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힘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권력으로 삼은 가진 자들 자신 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을 일으키듯, 사명을 잃어버린 삶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 단 지파의 이주(2)-정탐꾼의 눈에 본 라이스
라이스는 헐몬산 자락 아래에 있는 가나안 땅의 최북단의 성읍입니다. 당시에는 시돈 사람들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는데, 라이스는 시돈과 꽤 떨어져 있는 지역인지라, 그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않았던 지역이었습니다. 라이스는 헐몬산 자락에서 터져나오는 샘이 있는 곳이도 합니다. 이 땅을 좋게 평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이 라이스를 좋게 평가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조금 불편합니다.
    첫번째 이유는 그 땅이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였기 때문이랍니다. 시돈은 페니키아의 땅입니다. 페니키아는 당시 지중해 동쪽의 맹주였습니다. 엄청난 기술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고 무역을 통해서 얻어들이는 수익이 대단했습니다. 롯이 이집트를 보고 난 후, 이집트 땅과 같은 요단의 동편 소돔과 고모라, 그리소 소알을 살 곳으로 선택하였듯이(창 13:10), 이 정탐꾼들은 라이스를 가보니, 도시도 잘 정돈되어 있고, 체계도 잘 잡혀 있는 것이 그들이 부러워 했던 시돈 땅과 같았기 때문에 그 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보고한 겁니다. 이들의 땅 선택 기준은 시돈이었습니다.
    두번째로 댄 이유는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어서 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곳이어서 랍니다. 이들의 땅 선택의 또 다른 기준은 얼마나 우리에게 경제적인 선물을 안겨주는가 였던 것입니다. 어느 조건 하나 하나님의 눈으로 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자기 땅으로 돌아가서는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삿 18:10)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지 그 당시도 돌아가서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단지 단 지파의 정탐꾼들 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눈이 곧 사사 시대를 살아갔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부터 갖게 된 ‘자기들의 눈’이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 단 지파의 이주(3)-형제들 사이의 약탈
정탐꾼들은 정탐후에 소라와 에스다올로 돌아가서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고, 단 지파 사람들은 육백 명의 무기를 든 용사들을 앞세우고 유다 땅을 거쳐 에브라임 산지를 지나갈 요량으로 집단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미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정탐을 나갔던 다섯 사람이 단 지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지요.
“여기 여러 채의 집이 있는데, 이 가운데 어느 한 집에 은을 입힌 목상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고 있을 것이오. 목상뿐만 아니라 드라빔과 에봇도 있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소?”(삿 18:14)
    너무나 직설적으로 빼앗자고 말하는 겁니다. 미가의 집을 옹호할 마음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같은 열 두지파 공동체의 한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미가가 지난번 이 정탐꾼들을 재워줄 때,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재워준 것이니, 이것 만큼은 미가가 잘 한 일이지요. 그런데 지금 은혜를 원수로 값자는 모의를 하는 것입니다.
    신상의 은이 탐났을 수도 있습니다. 에봇에 박힌 보석들이 탐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상,  바로 그 자체가 탐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사사의 시대에 소유가 곧 권력이며, 소유가 나와 우리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팽배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의집에 가서 문안을 했다고 써있기는 합니다(삿 18:15). 그렇지만,  말이 문안이지,  인사하는 사람의 뒤로 육백명이 무장을 하고 서있는데, 그것이 정말 그동안 잘 있었냐는 안녕을 묻는 인사였겠습니까? 문이 열리자 마자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는 은으로 만들어진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레위 청년 제사장이 놀라며 도대체 무슨 일들을 벌이는 것이냐고 물으니, 단 지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조용히 하시오. 아무 말 말고 우리를 따라 나서시오.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어 주시오. 이 집에서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야 이스라엘의 한 지파와 한 가문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삿 18:19)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어달라”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나요? 삿 17:10에서 미가가 그 레위 청년에게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그 어순까지 똑같습니다. 아마 레위 제사장은 이 말이 달콤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하지만, 막상 내가 그들과 함께 하면 자신을 아들처럼 대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을 부탁하는 제사를 드리라고 하면서,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전하는 거짓 제사장의 역할을 시킬 것이라는 것을 이미 경험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레위 청년 제사장에게 중요한 가치는 새로운 시장과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렴 한 지파의 제사장이라면, 지파의 품위 유지를 위해서 일년에 은 열과 의복 한벌 보다야 많이 주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 고발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종교 지도자인 레위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쫓아가죠. 뒤도 안 돌아보고 쫓아갑니다. 그래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삿 18:20에서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서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 들어갔다”라고 비꼬며 이야기합니다.
❖ 단 지파의 이주(4)-약육강식의 시대 
미가가 이웃집 사람들을 모아 쫓아왔습니다. 워낙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집에 들어온 지라 제대로 반항도 해보지 못했지만, 이들이 떠난 후에 곧바로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서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쫓아온 것입니다.  미가가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그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찾으러 온 것일가요? 그저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강탈해 가지고간 단 지파 사람들은 전혀 미안한 마음도 없습니다. 오히려 뒤쫓아온 미가를 위협합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을거요. 이 사람들이 성이 나서 당신들을 치고, 당신과 당신의 가족의 생명을 빼앗을까 염려되오.”(삿 18:25)
그러니까, 쉽게 풀어쓰자면,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돌아가라. 만약 가만히 있지 않은면 우리가 너희들을 힘으로 칠 텐데, 그러면 미가 당신 때문에 쫓아온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려고 왔다가 오히려 우리에게 호되게 당할 것이고, 그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그 분풀이를 하지 않겠느냐?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느냐? 네 목숨이 위태로울 텐데!”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위협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말을 듣고는 미가가 돌아갑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상대가 자기보다 더 강한 것을 알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삿 18:26)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고발하는 사사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 하나님의 법은 없고 오로지 정글의 법칙 만이 통용이 되던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힘만 있다면, 누구의 것이든 무엇이든 약탈할 수 있었던 시대, 그리고 힘이 약한 자는 누구로부터도 보호 받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레위 제사장들은 힘을 가진 권력자들을 추종하고 그들과 결탁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수호하는 제사장들마저도 돈을 따라서 언제나 신앙을 꺾을 수도 있고, 재물을 쫓아 하나님이 주신 유업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살던 시대가 사사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성읍을 떠나서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아무데나 가서 불법한 제단을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살던 시대, 레위 제사장이라는 이가 우상과 드라빔도 거리낌 없이 섬길 수 있는 시대, 한 민족과 공동체를 위한 레위인 제사장이 아니라 한사람의 번영과 안위를 빌어주는 한 집안의 개인 제사장으로 전락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17장과 18장은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된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하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날카로운 고발장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었던 사사가 왕이 되려고 욕심을 내기 시작한 시대,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끌어 내려서 오히려 개인의 종으로 삼으려고 했던 시대를 그리면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눈’에 옳은대로 하였다”(삿 17:6)고 고발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사사들이나 종교 지도자인 레위인들이나 매 한가지 였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이 역사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큰 한 숨 쉬었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탄식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