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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마사다

마사다는 솔직히 왜 성지순례에 들어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장소 중에 하나입니다. 멋지기는 합니다만,  그 멋진 것을 다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약 1시간 30분 여만에 서둘러 내려오는 마사다는 그 입장료도 비쌀 뿐 더러, 성지순례의 원래 의미도 찾지 못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워낙에 알려진 장소인지라, 마사다가 빠지면 성지순례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같아요. 하지만, 성지순례가 목적이라면, 굳이 꼭 가야할 곳이라고 추천하지는 않겠습니다. 혹시 마사다를 빼는 것이 아쉽다면, 이 글을 읽으시면서 그냥 마사다를 생략하세요.

 

요새화된 마사다 

마사다 מצדה는 그 히브리어의 어근 자체가 “요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새라는 어근에 걸맞게 마사다는 사해바다 서쪽의 유대광야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성채입니다. 사해 바다를 기준으로 마사다를 거슬러 올라가려며 약 400m나 되는 절벽같은 길을 올라가야하고, 그나마 좀 괜찮다 싶은 서쪽의 90m는 절벽인지라 사람이 오르는 것 조차가 불가능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이곳에 언제부터 살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이곳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요새가 만들어 진것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요나단 마카비 (142B CE) 시대와 알렉산더 얀네우스 (103-76 BCE) 시대였습니다. 남쪽으로는 이두메 사람들, 그리고 동쪽으로는 나바테 사람들의 침략으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한 목적의 요새였지요. 하지만, 이 요새가 정말 요새답게 무장을 하고, 오늘날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보는 건물들이 축조된 것은 헤롯대왕 (37-4BCE) 시대였습니다.

Masada Etching

 

헤롯과 마사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은 74 BCE에 이두메 (에돔) 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두메 지역은 독립적인 왕국이 아니라, 유대 지방에 편입된 한개의 지방이었기 때문에 헤롯이 비록 이두메의 귀족 가문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유대 지방에서는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헤롯의 나이 갓 25세 때에 갈릴리 지역의 행정 장관으로 임명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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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헤롯이 순수한 이방인이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헤롯의 어머니가 하스모니안 왕조의 공주로 유대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정황으로 보았을 때에 헤롯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유대 땅에서 165 BCE 이래로 지속되던 하스모니안 왕가가 기울어져 갈 무렵인 63 BCE 부터 37 BCE 사이에는 하스모니안 왕가는 유명무실해지고 로마가 적극적으로 유대 땅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폼페이 장군이 바로 이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헤롯은 꾸준히 자신의 정치력을 키워 나갑니다. 그리고 37 BCE 에는 로마의 속주인 유대 (Judea) 지방을 다스리는 왕으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유대 지방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유대인이 아닌 것에 대해서 매우 큰 부담감을 가졌던 헤롯과 그 일가는 모두가 유대교로 개종을 합니다. 정치적인 선택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들을 펼쳐 나갑니다. 성전을 증축하고, 유대교를 권장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마련해 나아가지요.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 지 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헤롯의 머리 속에서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하여 피난을 갈 피신처를 물색하지요. 그의 눈에는 마사다가 최적지였습니다. 이미 천혜의 요새로 갖출 수 있는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는 데에다가 이두메 지역과 매우 근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동조자들을 규합하기도 그보다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사다를 자신의 만약을 대비한 피난처로 삼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사다는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헤롯에게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헤롯에게 치명적인 외적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였습니다.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 사랑 때문에 안토니는 훗날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는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게 되는데, 그랬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마사다 건축

마사다는 37 BCE 부터 31 BCE 사이에 7년에 걸쳐서 건설되었습니다. 마사다는 남북으로의 길이는 약 550m이고, 동서로의 폭은 약 270m가 되는 다이아몬드형의 절벽위의 도시입니다. 이 절벽의 주위로 약 1.3km가 되는 4m 높이의 성벽이 쌓여 있었으니,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이 요새를 점령하려는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 놓기에는 충분한 요새이지요. 게다가 이 요새로 올라가는 “뱀 길” (Snake Path) 은 이 요새에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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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궁전

이런 요새에 헤롯은 두개의 궁전을 세웁니다. 하나는 마사다의 서쪽에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궁전입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과 넓은 마당, 그리고 가까운 곳에는 헤롯 왕가 전용의 정결욕조 (또는 헤롯을 위한 전용 수영장) 를 구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헤롯의 궁전의 백미는 마사다의 북쪽 절벽 끝자락에 건설한 삼층 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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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광야의 태양과 후텁지근한 바람이 부는 유대 광야의 남단에 자리잡은 마사다에서 지낸다는 것이 왕인 헤롯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헤롯은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마사다의 북쪽 끝자락 절벽에 궁전을 지었는데, 매우 호화롭게 삼층으로 건설했습니다.

삼층으로 지어진 궁전의 맨 위는 헤롯의 사무공간, 또는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층의 원형 건물은 헤롯이 즐기기 위한 위락의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맨 아래 궁전은 아름다운 프레스코로 장식되었던 헤롯 전용 공간으로 헤롯 만을 위한 사우나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유대 지역에서는 얼마나 물을 마음 껏 사용할 수 있는가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재의 마사다는 1962년 이스라엘의 암벽 등반가들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어요. 마사다 북쪽의 헤롯의 중간  궁전 쪽으로 올라간 암벽등반가들이 고고학 유적지가 있는 것을 보고 정부에 신고를 하면서 1963년부터 마사다 발굴이 시작이 되었는데, 현재 (2014년) 에 이르기까지 약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마사다는 줄곳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었습니다. 현재 발굴과 복원이 된 마사다의 건물만으로도 헤롯 시대의 마사다가 얼마나 웅장하고도 위엄있는 곳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는데요, 마사다의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면서, 도대체 이 건물들을 세우기 위한 돌들을 어디에서 가져왔는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사다의 건축물들을 세운 돌들은 어디에서 옮겨 왔는가?

마사다의 곳곳에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해결해 주는 채석장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 자체가 돌 땅이다가 보니까, 굳이 어디에서 돌을 옮겨올 필요가 없이, 마사다의 절벽 위의 땅에서 돌을 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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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건물을 축조하기 위해서 돌을 뜨는 작업, 그리고 그 돌을 운반하는 작업에 아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일일이 사람의 손을 돌에 기본적인 틈새를 만들고, 그 틈새에 쐐기 모양의 나무를 끼워넣어서 망치로 쐐기를 쳐서 돌을 떠내는 방식으로 건물을 만드는 돌들을 쪼개고, 거친 돌들을 잘 다듬에서 건물을 짜임새있게 만드는 것이 고대의 채석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석공들과 돌을 떠내는 일을 담당할 노예 또는 부역 일꾼들이 필요했는데, 강력한 전제 군주였던 헤롯에게 이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건물을 세우기 위한 좋은 돌이 있는 장소가 필요했지만, 마사다는 그런 걱정조차 필요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사다 자체가 유다광야의 일부였기 때문에 충분한 석회를 함유하고 있는 데에다가, 사해 바다 옆에 있는 유대광야의 절벽인지라 기본적으로 그 땅은 백운석 (Dolomite)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양질의 건축용 돌들이기 때문이지요. 마사다를 올라서서 처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마사다의 채석장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함몰된 땅의 일부분처럼 보이지만, 2,000전에는 돌을 뜨는 사람들과 돌을 쪼는 사람들로 붐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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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에서의 생존 

아무리 마사다가 천혜의 요새라고 하지만, 여름이 되면, 40도를 훌쩍 넘는 온도에 그늘 하나 만들어 줄 나무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66 CE 에 시작된 유대인들의 항쟁이 70년에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일단락 지어진 후에, 70 CE 부터 73 CE 까지 약 4년 여간을 이 마사다에서 살아야했을 유대인 최후의 반란군들의 팍팍한 삶은 굳이 상상하지 않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마사다의 창고 

헤롯은 만약에 자신이 대피할 경우와 자신의 가족들과 자기를 보호할 군사들이 먹고 입을 충분한 양의 물자들과 무기들을 마사다의 창고에 쌓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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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의 북쪽을 발굴하면서 사우나 시설과 헤롯의 궁전, 그리고 로마군의 작전 기지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길쭉 길쭉한 창고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창고들에는 주로, 포도주, 올리브 기름, 그리고 곡식을 담은 항아리들이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창고들은 마사다의 북쪽 뿐 아니라, 헤롯의 서쪽 궁전 주변에도 이런 창고들이 발견되었어요. 마사다 요새의 이곳 저곳에 전반적으로 넓게 분포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비록 넉넉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마사다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치던 960여명의 사람들이 4년여 먹고 살기에는 충분할 정도였으니, 마사다에 저장되어 있었던 생필품과 무기, 그리고 밀가루와 같은 음식재료들의 양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마사다의 물 공급

마사다가 아무리 철옹성같은 요새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안에서 마실 물이 없다면 진정한 요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무기가 있다고한들 그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가요? 로마 군인들도 바로 그 점을 간파했습니다. 마사다 요새를 올라가기는 힘들지만, 그 많은 인원이 그 위에서 얼마나 버틸까하며 마사다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고사시키는 작전을 감행한 것이지요.

아직까지도 실바 장군의 로마 제 10군단이 만들어 놓은 마사다 주변의 로마군 진지와 마사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필품이나 군수 물자를 외부에서 옮겨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마사다를 360도 둘러싼 로마군의 포위 담이 고스란히 광야에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보면서 감탄할 만한 로마군들의 위엄 앞에서 2,000 여년 전의 유대인들은 또 얼마나 위축되었겠습니까만, 결과적으로 로마군의 작전은 실패였습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마사다에는 충분한 물자가 이미 넉넉히 준비된 데에다가 헤롯은 마사다에 엄청난 양의 물 저장고들을 만들어 놓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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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광야는 대부분 석회입니다. 게다가 유대광야는 그냥 넓직한 평지도 아니라, 경사가 급한 구릉들이 오밀조밀하게 서로 맞대어 이어진 건조한 땅입니다. 그러다보니, 비가 오면 비가 땅에 흡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경사면을 따라서 빠른 속도로 흘러 내립니다. 땅이 물을 머금을 새도 없이 말이지요. 석회의 땅이니 땅 속 어디에선가는 동굴이 생기고, 기다린 동굴 어디에선가는 우리나라의 석회 동굴들처럼 시냇물도 흐르고, 동굴 안에서 강이 흐르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드러난 지표에서는 물을 찾기도, 구하기도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광야에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물을 모으는데요, 경사면에 물이 흘러 내릴 수 없도록 돌을 살짝 쌓습니다. 그리고는 물의 방향을 이미 파 놓은 물 저장고 (Water Cistern) 쪽으로 흐리게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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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광야 한가운데 만들어 놓은 물 저장고에 물들이 가득 차게 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헤롯도 유대 광야에서 물을 저장하는 그 방식 그대로를 마사다에 차용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빗물들을 마사다 쪽으로 물길을 틀어 마사다의 절벽으로 향하게 하지요. 그리고 마사다의 절벽 곳곳에 물 저장고들을 파 놓고서는 그 안으로 빗물들이 흘러들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자연방식으로 매년 우기 때마다 마사다에 저장되는 물의 양이 4만톤입니다. 그러니, 마사다에서 물이 없어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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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의 연료기지 

밀가루와 물이 있다고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빵을 구을 화덕에 불을 지필 연료가 있어야하니 말입니다. 마사다는 비도 많이 오지 않는 광야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물도 없었을 뿐 더러, 연료로 사용할 나무도 없었습니다. 연료는 단지 빵을 만드는데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헤롯의 호화로운 로마식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사다 요새 가운데 만들어 놓은 사우나 시설인데, 냉탕, 온탕, 찜질방(caldarium)으로 구성된 사우나의 물을 데우거나, 찜질방의 열기를 올리는데에도 땔감이 필요했거든요. 이런 사우나 시설이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마사다 북쪽에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을 위한 커다란 사우나 시설을 두었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절벽의 궁전에는 헤롯 전용 사우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마사다의 창고에 땔감을 쌓아둔 흔적은 보이질 않습니다. 대신에 마사다의 곳곳에는 비둘기 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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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집은 로마 시대 이후로 흔히 발견되는 고고학 유적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 그 용도는 다양했습니다. 비둘기는 고기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비둘기의 배설물은 땅을 기름지게 하는 퇴비로 사용되기도 하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제의의 용도로 사용될 비둘기들을 사육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비둘기의 배설물은 연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동물들의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하는 것은 오래된 연료 공급방식이기도합니다. 현재에도 베두인들은 나귀의 배설물들을 모아서 연료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마사다의 사우나 

로마의 멸망의 원인을 “사우나”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로마의 문화가 들어가 있는 곳곳에는 로마식 사우나들이 즐비하게 많았습니다. 흔히들 로마의 사우나를 기억하면서 “동성애”를 떠올리는데요, 로마의 사우나 문화에 동성애라는 부분이 일부분은 될 수 있겠으나, 사우나를 출입했던 모든 로마 사람들이 동성애를 즐겼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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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사우나에서는 오늘날의 본연의 목적인 몸에 땀을 빼고 목욕을 하는 일 이외에도, 고위직들이 정치를 평가하고, 학자들이 철학을 토론하고, 사우나의 마당에서는 체육을 즐기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로마의 사우나는 사우나를 이용할 수준의 사람들 (아무래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의  친목과 교제의 장소로 널리 사용되었던 장소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문화가 전해진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로마식 사우나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마사다에서도 당연히 사우나 시설이 있었습니다. 마사다에서는 두개의 사우나 시설이 발굴되었는데, 하나는 고위 귀족들을 위한 사우나였고, 다른 하나는 헤롯 전용 사우나 공간이었습니다. 물도 구하기 힘든 유대광의 한 복판에서 그것도 흥청망청 물을 써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물을 마사다 옆구리의 물저장소에서 길어 올렸던 하인이나 노예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마사다와 반로마 항쟁

유대 지방은 63 BCE 부터 로마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 사이에서 로마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이 일어나거나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헤롯이 병상에 있던 4 BCE 에는 바리새인들이 헤롯과 로마에 반대하여서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으로부터도 환심을 사고, 로마 황제로부터도 신임을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공사한 다음 (20 BCE), 성전의 입구에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 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종교적으로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던 바리새인들은 헤롯의 힘이 약해져 갈 무렵에 헤롯에 대해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성전 입구에 있던 이 황금 독수리 상을 부숴 버려요. 종교적으로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심의 표현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반대하는 소요의 불씨로 비춰졌을 겁니다. 로마에서는 이것을 중요한 사태로 인식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였고, 바리새인들의 소요는 곧 진압이 됩니다. 그리고 이 소요를 진압하는데에 로마와 함게 앞장을 선 헤롯의 아들들은 그 대가로  유대의 분봉왕 (Tetrach) 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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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잘 알려진 유대인들의 반로마 항쟁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멸망을 야기시켰던 66년의 항쟁이지요. 이 전쟁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 The First Jewish-Roman War 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대항쟁” The Great Revolt 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항쟁의 원인은 하나님 뿐 아니라, 성전에서 황제에게도 신과 같은 급의 경의를 표해야하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너무나 혹독한 로마의 세금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66년에 가이사랴 지역에서 처음 발발한 항쟁은 삽시간에  유대 땅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시리아에 주둔하던 갈루스 Gallus 장군이 진압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곧 황제 네로 Nero 는 베스파시안 Vespasian 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이집트를 거쳐 유다로 진격하게 하지요. 네로의 갑작스런 하야로 유대지방에 진군하였던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되고 베스파시안은 자기 아들 티투스 Titus 를 유대인 항쟁을 정리할 새로운 장군으로 임명합니다. 이런 로마의 군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이 됩니다.

마사다와 대항쟁

대항쟁 시대의 마사다의 역사는 그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 남았던 두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을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사다는 대항쟁이 시작이되던 66년에 열심당 중에서도 매우 과격한 분파였던 시카리 Sicarii 에 의해서 점령됩니다. 시카리 Sicarii 라는 말은 라틴어 Sicarius 의 복수형인데, 그 의미가 “단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옷 주머니에 늘 단검을 지니고 다니면서 언제라도 싸울 준비, 급습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이 시카리의 지도자는 엘르아잘 벤 야이르 אליעזר בן יאיר Eleazar ben Yair 였습니다. 이 시카리들은 같은 유대인 항쟁 그룹 안에서도 사사건건 부딛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포위 당했던 때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시카리들은 유대인 그룹들 안에 서로 의견들이 갈라지면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멸망하기 바로 직전에 시카리들과 그 가족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서 이미 그곳에 66년부터 주둔해 있던 시카리들과 합류하게 됩니다.

Masada Seige

티투스를 이어서 로마군을 이끈 실바 Silva 가 유대인 반란군의 마지막 무리들이 모여있는 마사다로 72년에 진군을 해 옵니다. 15,000명의 로마군들이 고작 960명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만큼 마사다가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상징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고, 그만큼의 병력이 있어야 점령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로마군들은 먼저 마사다에 있는 시카리들을 고사(枯死) 시키기 위해서 마사다를 둘러싸는 포위 성벽을 쌓습니다. 수천 톤의 돌들이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이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으로 안 로마군들은 직접 마사다안으로 진입하기 위한 군사적인 용도의 비탈길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비탈길의 위치는 비록 깎아지르는 절벽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은 공사기간이 소요될 서쪽 절벽을 선택합니다.

로마군램프

그리고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아 3개월에 걸친 대공사를 시작합니다. 마사다 안에 있었던 시카리들은 이 공사를 그저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물론 적극적은 공격으로 공사 자체를 방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공사에 동원된 노예들이 모두 자신들의 형제들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그 공사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마사다와 회당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 어느 곳에나,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반드시 있는 곳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회당입니다. 회당은 때로는 마을 회관과 같은 기능으로, 때로는 성경공부를 하는 곳으로, 그리고 때로는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법정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마사다라는 곳의 특성상 이곳의 회당의 주된 기능은 기도를 하거나, 마을 회관과 같은 기능이 훨씬 더 강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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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그 긴 전쟁이 끝나기 전 마지막 날 밤이었습니다. 시카리의 지도자였던 엘르아살이 모든 가장(家長)들을 이 곳 회당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되지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진리되시고 정의로우신 인류의 주인이신 오직 한분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아가겠노라고, 그리고 절대로 로마인들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로마군은 총공격을 해 올 겁니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아내가 능욕을 당하기 전에, 우리 자식들이 노예가 되기 전에 죽음으로 자유를 선택합시다… 우리는 로마인들을 대항하여서 들고 일어선 첫번째의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예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힘이 있을 때에 용감하게 자유인으로 죽읍시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법에 자살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엘르아살은 항아리를 깨뜨리고 깨뜨린 항아리의 파편에 가장들의 이름을 씁니다. 그리고 제비 뽑기를 해서 순서대로 자기 가족들을 모두 죽인 후에 다시 회당으로 돌아오는 거지요. 마지막 가장들만 남았을 때에, 열명을 선택해서 다른 이들을 죽이고, 나머지는 서로 죽여주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만이 스스로 죽어야했으니, 사실 그 한 사람이 960명의 모든 짐을 다 짊어졌다고 해야할 것같아요.

예로부터 전쟁에서 내가 남긴 물건은 적군의 보급품이 되는 법이지요. 그래서 물은 쏟아 버리고, 먹을 것들은 태워버리고, 화살은 꺾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엘르아살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먹을 것을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이지요. 먹을 것이 없어서 싸울 것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을 로마 군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마사다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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