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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6] 다섯번째 사사 기드온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6] 다섯번째 사사 기드온

❖ 미디안 사람들

므낫세사람 기드온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미디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시작에 대해서는 창세기 25장에 나와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얻은 세번째 아내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의 명단에 미디안이 있습니다(창 25:2). 굳이 조상의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아담의 후손이고 한 가족이겠지만, 조금더 가까이 올라가보면, 아브라함-이삭-야곱(이스라엘)으로 내려오는 족보를 보건데, 미디안이나 이스라엘이나 모두가 같은 할아버지(아브라함)를 두고 있는 커다란 범위의 한 가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혈통으로 한 가족이라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신앙으로 한 가족이 되는 것 사이에는 정말 큰 간격이 있는 것같아요. 창세기의 내용에 보면, 미디안의 자손들이 가나안을 떠나 동쪽으로 갔다고 말하는데요(창 25:6). 아마 오늘날로 말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 주변의 땅으로 이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가나안식 문자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이 남겨놓은 문학이라고 할만한 글이라던가, 기록해 놓은 석비, 또는 토기 위에 써 놓은 글과 같은 것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미디안 사람들이 나라를 만든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요. 향료나 향신료를 주요 물품으로 지역과 나라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대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래서 요셉도 미디안 사람들에 의해서 팔려갔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창 37:28)? 한 지역에 정착하며 살던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주거지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미디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 중에 홍해에 가까운 딤나(Timnah)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 지역은 당시 번창하던 구리 광산었어요. 이 구리 광산 지역에 하토르(Hathor)라는 풍요의 여신을 섬기던 신전이 있는데, 미디안 사람들이 세운 신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미디안 사람들, 또는 적어도 미디안 사람들 중의 일부는 하토르를 섬겼다고 추정할 수 있겠네요. 일반적으로 대상들은 단지 물건 만을 파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군인이기도 하거든요. 미디안 사람들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닐 때,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있는 물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다니다보면, 마을 사람들의 성향은 어떤지, 그리고 그 성의 치안의 상태는 어떤지, 마을 사람들이 그 성읍의 지도자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등등 시시콜콜한 마을과 성읍의 정황들을 알게 되는데, 이런 정보가 축적되다보면, 그들이 가진 무력으로 한 성읍이나 마을을 약탈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삿 6:5). 그러니, 미디안 사람들을 사막의 바이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이들은 이렇게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는 용사

낙타를 탄 베테랑 전사들인 미디안 사람들이 워낙에 강력한 지라, 이 들이 한번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휘저으면 감당해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산에다가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고 살았다고 합니다.

산에 파놓은 굴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던 광야의 오아시스인 엔게디에 가보면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 절벽 한 가운데 굴을 파놓고, 그 굴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동굴은 기원전 8-7세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쿰란 사람들이 기록했던 두루마리 중의 일부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살 만큼의 넓은 공간을 만들기 전에 이미 작은 동굴이 자연적으로 있었을 거예요. 그 동굴을 사람이 손을 대서 팠을 텐데요. 아마도 절벽 맨 위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작업을 했을 겁니다. 작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하면, 이제는 파놓은 동굴에서 물이 있는 아래 골짜기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잠을 잘 때나, 적들이 쳐들어 오면 사다리를 걷어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적들이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안전한 피신처가 되는 겁니다. 기드온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동굴에 살았다고 상상해 보세요. 물론 “안전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동굴에 들어가서는 그 아래쪽에 심어 놓은 농작물과 양, 소, 나귀들이 약탈 당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볼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처지도 함께 상상해 본다면, 삿 6:2이 매우 비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비참했던 이스라엘의 상황은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그림 그리듯 묘사됩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던 중이었습니다(삿 6:11). 밀은 타작마당에서 나귀가 타작하는 타작판을 끌면서 밀의 낱알을 떨구고, 바람에 날려서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타작마당의 크기야 각 집안마다 그 수확량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나귀가 빙빙 돌면서 타작판을 끌고가는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면, 아무리 적어도 30평 남짓의 공간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짜는 틀은 대부분 바위를 깍아서 만들기 때문에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나귀가 타작판을 끌 수도 없을 뿐더러, 그 크기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3평을 넘지 않습니다. 또 타작마당은 평지에 만들어 놓지만, 포도주를 짜는 틀은 언덕배기나 산에 있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그 시기에 당연히 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기에 타작마당에서 밀을 타작하면, 미디안 사람들에게 약탈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 중턱이나 언덕 어딘가에 만들어 놓은 작은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미디안 사람들 몰래 손으로 밀 낱알을 털고 있었던 것이지요. 기드온과 같은 이스라엘의 큰 용사(삿 6:12)가 이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 끝없는 수탈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구절이지만, 조금더 깊이 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미디안 사람들에게 잔혹한 수탈을 당했는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수탈한 시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위의 이야기처럼 밀을 수확하는 시기에 쳐들어 와서는 지난 한 해의 농사의 결실을 빼앗아가기도 했지만, 파종할 때에도 이스라엘 땅에 와서 약탈을 했습니다(삿 6:3). 이스라엘의 달력을 참조해 보면, 씨를 뿌리는 시기는 아홉번째 달이나, 열번째 달입니다. 그리고 밀을 거두는 시기는 세째달이구요. 그러니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의 약탈을 서술하는 이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미디안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반년(6개월)마다 이스라엘에 와서는 파종하기 위해사 지난 여름 창고해 보관해 놓은 밀 씨앗들과 밀을 추수하고 거두어 들인 낱알들을 모조리 쓸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또 파종하는 시기에 양, 소, 나귀도 남기지 않고 가져갔다고 했는데요(삿 6:3-5). 씨뿌리는 달인 열번째 달 바로 한 달 후가, 양들이 새끼를 낳는 시즌입니다. 그러니, 파종하는 때 이스라엘에 메뚜기처럼 몰려들어와서는 곧 출산을 앞둔 임신한 암양들을 약탈해 갔다는 것이지요. 끝임 없는 수탈이면서 셈조차 할 수 없는 대규모의 약탈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 없이 살면 자유로울 것 같고, 내 눈에 좋아보이는 대로 살면 행복할 것같아 보였지만, 결국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끝없는 약탈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아이러니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결말이기도 하구요. 결국 이스라엘은 그제서야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 여호와, 여호와의 사자, 선지자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 때문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살려달라고 했겠지요.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했겠지요. 그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삿 6:8).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제일 먼저 전한 것은 ‘출애굽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잊고 살았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이스라엘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모든 신들보다 위대한 신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집트의 그것들이나, 지금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섬기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이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다시금 출애굽의 역사를 되짚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그 선지자를 ‘여호와의 사자’라고 부릅니다(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왔습니다. 그 때, 기드온이 그 선지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물어보지요. 그 때, 선지자가 기드온에게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6:14에서 “선지자가 그를 향하여 이르되,” 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호와, 여호와의 사자, 선지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모두가 같은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번역을 해 놓았지만, 이 표현의 히브리어 ‘말아크 아도나이’ מלאך יהוה는 ‘여호와의 천사’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히브리어 ‘말아크’ מלאך를 천사라고 번역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천사’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영적인 존재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요. 영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메신저'(Messanger)입니다. 그러니, 우리 말로 ‘사자’라고 번역한 것은 참 잘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리말 구약 성경의 제일 마지막이 ‘말라기’이지요? 히브리어로는 ‘말아키’ מלאכי, 우리 말로 해석하면, ‘나의 천사’, ‘나의 메신저’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나의 사자’,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선지자의 역할이 바로 그거예요. 자기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부르신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전달하는 순간, 그는 메신저, 천사, 사자, 선지자가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곧 ‘하나님의 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기드온에게 이야기 하는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삿 6:14,16)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삿 6:20)라고 기록해는데, 이 모든 표현은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곧 여호와의 사자요, 여호와의 사자가 곧 여호와의 천사이며, 여호와의 천사가 곧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그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도식은 여기 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이야기(창18),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이야기(창 32),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이야기(삿 13) 등에서도 계속 나옵니다.

❖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 그러나 여호와 샬롬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출 33:20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라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등 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사실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이고요. 기드온은 자기가 만난 사람이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사자이고, 하나님의 천사이며,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하기에 자기에게는 여호와’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갑작스레 그 사자가 놀라운 기적과 함께 제물이 드려진 뒤 사라진 것을 보고서는 떨면서 말하지요. “여호와 하나님, 내가 주님의 천사를 대면하여 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가 곧 여호와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셈입니다. 그러니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기드온은 곧 죽게 될 겁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 주셨습니다. “안심해라. 두려워 할 필요없어. 넌 죽지 않을거야.”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그 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그가 여호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말이니까요.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죽음이 아니라,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기드온 사이의 관계 회복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과의 관계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닐지요. 그러나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샬롬)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는 바알의 제단이 있었습니다(삿 6:25). 참 아이러니 합니다. ‘요아스'(히. 요아쉬 יוֹאָשׁ)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집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알을 위해서 불을 피우고 제사를 드리는 바알의 제단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알 수 있지요. 기드온의 집에 바알을 위한 제단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냥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성경을 잘 읽어보니, 기드온의 아버지의 제단은 개인용 제단이 아니라, 그 성읍의 사람들 모두가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려면 그 제단을 찾아왔다는 것도 알수 있습니다(삿 6:28이하). 그러고 보면, 요아스가 바알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했거나, 바알 신앙을 수호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것으로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기드온은 그런 집안의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바알 신앙에 물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호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샬롬)를 회복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 분명해 졌습니다. 그 제단을 허물고, 바알 신앙을 그 집안과 이스라엘로부터 끊어낸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 이상한 제사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향한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바알의 제단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바알의 제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발견되는 이방신들을 위한 제단들의 일반적인 모양들로 보아서, 사각형 또는 동그라미 모양으로 돌들을 쌓은 형태일 겁니다. 기드온은 산성의 꼭대기, 헐어버린 아버지 집의 제단 옆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제단을 만들 때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습니다. 사용하는 재료의 문제와 모양의 문제인데요. 하나는 돌로 제단을 쌓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돌로 제단을 쌓을 때에는 다음지 않은 돌로 만들어야합니다. 정으로 쪼아서 다듬은 돌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제단을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지 말아야합니다. 이유는 제사장의 하체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아래의 사진은 이스라엘의 므깃도(Tel Megiddo)라는 곳에 초기 청동기 시대, 그러니까 대략 3500–3100 BCE 사이에 만들어진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가나안 땅으로 오기 이전의 시대였고, 므깃도에 사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떠오르는 해, 또는 달을 섬겼을 것입니다. 이 제단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단은 저렇게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 때, 정으로 쪼개며 깎지 말고, 이방의 제단처럼 계단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양의 차별화를 통해서 그들과 우리 이스라엘이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두번째는 흙으로 단을 쌓는 방법이예요(출 20:22-26).

기드온은 급하게 만들어야 했으니, 아마도 흙으로 만든 제단을 만들었을 겁니다. 이미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드리던 부정한 돌로 제단을 만들 것같으면, 헐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만든 후, 나무로 만든 아세라 상들과 바알들을 찍어서 그 나무들로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된 우상들의 모양들을 보면, 대부분이 흙을 구운 것이거나, 청동, 또는 금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아마도 나무로 만들어진 우상은 오랜 기간 동안 보존되기 힘들었기 때문에 현재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원래 율법에서 말하는 것과도 크게 부딛치는 것도 없고요.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기드온의 아버지에게 있는 칠년된 둘째 수소를 끌어다가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왜 하필 둘째 수소일까?” 제물을 드릴 때 몇가지 조건들이 있습니다. 수컷이어야한다는 조건도 있고, 흠이 없어야한다는 조건도 있습니다. 또, 제사에 따라서 처음 태어난 것을 제물로 드려야한다는 단서도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둘째 수소”를 제물로 규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 수소”라는 표현이 성서 해석자들에게는 고민거리였습니다. ‘둘째 수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파르 하쉐니’ פַר הַשֵּׁנִי 라고 읽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이 없었어요. 그러니, 원래는 모음 없이 פר השני 라고만 쓰여 있었습니다. 이 자음들만 나열된 히브리어는 ‘파르 하쉐니’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파르 하샤니”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파르 하샤니’라고 읽으면, ‘튼실하고 기름기 많은 보기좋은 수소’로 뜻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기원전 3세기에 히브리어를 모르는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그리스어로 번역이 된 성경의 사사기에는 “칠년 된 둘째 수소”가 아니라, “칠년된 기름진 수소”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 기드온, 여룹바알

그 튼실한 숫소를 끌고 와서 밤 중에 제사를 드립니다. 무서웠거든요.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이라고 섬기고, 최고의 신이라고 모시는 바알의 제단을 허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지는 충분히 상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또 아버지와 기드온의 가족들에게는 그 바알 제단이 큰 수익을 안겨주는 장소인데, 그것을 허물었을 때, 아버지와 가족들로부터 받게 될 비난 역시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밤 중에 제단을 허물고, 밤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말이지요. 아침이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완전히 사색이 되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에게 아침 제사를 드려야하는데, 제단은 허물어 졌고, 흙으로 쌓아 올린 허름한 제단이 떡허니 있는 거지요. 이제 곳 성읍의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지내러 올텐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했을 것입니다. 성읍의 사람들의 반응은 더 격렬했습니다. “네 아들을 끌어 내라. 반드시 죽여야 하겠다.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어냈다.” 바알의 제단이 허물어 진 것을 보고 분노했던 사람들, 나무로 만든 바알과 아세라 상이 찍혀 나가고 태워진 것에 분개한 사람들은 므낫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지요.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바알의 제단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디안으로부터 압제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못살겠노라고, 그래서 구원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부르셨습니다. 사사기의 순환구조에 의하면 이제 기드온을 중심으로 전쟁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기전에 ‘기드온의 집에서 벌어진 일’이 불쑥 끼어 들어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 부분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문제는요, 이스라엘과 미디안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거예요. 미디안의 억압을 끊어내고 다시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샬롬) 회복시켜야 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의 순환 구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가 툭 튀어 나온 겁니다. 기드온(גִּדְעוֹן)은 ‘잘라 버리다'(גד”ע)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이것은 단지 바알과 아세라의 상을 찍어버린다는 의미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과거의 삶을 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오늘을 알리는 이름입니다. 기드온의 적은 표면적으로는 미디안이었지만, 진짜 적은 바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있은 후, 기드온은 ‘바알과 다투는 자’, ‘여룹바알'(יְרֻבַּעַ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겁니다.

❖ 사사도 온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이 그 삶을 바꾸어 놓았을지라도, 어제까지 바알을 섬기던 기드온이 갑자기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사사들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이 책에서 기드온의 시대부터는 사사들의 부족한 점들이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사사들 조차도 점점 온전한 하나님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즉, ‘사사들의 내리막 길’을 보여주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르엘 골짜기에 미디안,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들이 진을 쳤습니다. 기드온은 사자들을 보내서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는 불렀습니다. 왜 열 두지파 모두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만, 이미 드보라의 시대부터 그 징조를 보인 열두 지파들의 연대가 느슨해지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는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미디안은 강력한 낙타 부대를 이끌고 지금까지 칠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낙타 부대들은 주로 평지를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대상들은 주요한 길을 따라서 장사를 하고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 주요한 길들이 산지를 통과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왕의 대로와 해변 길, 그리고 골짜기의 평지를 따라서 형성되었고, 미디안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길들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이 길들에서 벗어나 있거나, 이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산지에 속하는 유다, 시므온, 베냐민과 에브라임은 처음부터 미디안과의 전쟁을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사라면, 온 이스라엘을 불렀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들을 모두 부르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인 이스르엘 골짜기를 기대어 살고 있는 네 개 지파만을 소집한 것입니다. 막상 이 지파들을 불러 놓고도 정말 이길 수 있는지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징표를 구합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둘텐데, 아침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에는 없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마른 땅에서 이슬에 흠쩍 젖은 양털을 보여주었으면, “아이고,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이제는 주님 말씀대로 나가서 싸우겠습니다.”해야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양털의 이슬은 마르기 쉽지 않지만, 땅의 이슬은 해가 뜨면 곧 마르니,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그냥 자연 현상이겠다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또 다시 하나님께 징표를 요구해요. 이번에는 땅은 다 젖고, 양털만 말라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마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요청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단지 기적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사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바램대로 응해 주셨지만, 이제 사사도 예전의 사사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희석되는 현상이 단지 일부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사를 비롯한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흐르는 풍조가 되었다는 것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기적을 통해서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 이상한 전쟁, 하나님의 전쟁

기드온은 하롯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미디안의 진영은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전쟁을 하기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이 3만2천명이었습니다. 참 많이 모였겠다 싶지만, 미디안 군사의 수가 13만5천명이었으니(삿 8:10), 절대로 3만2천명이라는 수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수가 많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동안 봐왔던 이스라엘의 믿음의 상태로 보건데, 이 전쟁에서 이기면 분명히 자기들이 잘 싸워서 이겼노라고 으스댈 것이 분명하거든요.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우리가 1:5로 싸워서 이겼다!”며 자랑들을 늘어 놓겠지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두려운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말하니, 2만2천명이나 돌아갔습니다. 갑자기 2/3가 이탈한 것입니다. 불러서 오기는 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땅에서 그 누구를 신이라고 부르던 내 배만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알이던지 아세라이던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미디안으로부터 약탈을 당해서 힘들게 살아갈 지언정, 목숨만 붙어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1만명 밖에 안남았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아도 한 사람이 적어도 13명을 맡아서 싸워야 하는 힘든 전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시 이 수도 너무 많다며 이들 중에서 싸울만한 사람을 선택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싸울 자격이 있는 자들인지 ‘시험’하시겠다고 합니다. 바로 전에 기드온은 이 전쟁에서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정말 구원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곧이어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은 “현실점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롯으로 내려간 기드온은 병사들에게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그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시원한 물이 터져나오는 샘을 만난 사람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물에 뛰어드는 사람, 들고 있는 창과 방패를 잠시 내려놓고, 벌컥벌컥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물 속에 쳐 박으며 마시는 사람, 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사람만이 전쟁에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고대 성서해석자들은 이렇게 물을 마시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한 손에는 창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두 손으로 마시면 손을 모아서 후르륵 마실 수 있는데, 개처럼 핥았다면, 분명히 한손으로 물을 떴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한손에는 창이나 방패를 잡고 있지 않았겠나하는 상상인거지요. 전쟁터에서 물을 만났지만, 늘 주변에 적들이 있는지를 경계하면서 마시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쟁터에 나왔지만 의무감으로 어쩔 수 없이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온 이들을 선택하신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신 사람들이 고작 300명입니다. 3만2천명 중에 300명이라고 한다면, 그 수가 1/100 이하로 줄어든 셈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 전쟁은 사람이 이끄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300명 대 13만5천명, 그러나 병사들의 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미디안 진영을 염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때, 미디안 진영에서 대화하는 미디안 군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이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서는 장막을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삿 7:13). 그리고는 그 보리떡이 기드온일 것이라는 염려어린 대화였습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라고 번역이 된 ‘쯜릴 레헴 세오림’ צְלוּל לֶחֶם שְׂעֹרִים 이라는 말 중에서 ‘쯜릴’이라는 히브리어는 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 Hapax Legomenon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문맥상 그냥 ‘덩어리’라고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그 어원을 찾아 올라간다거나, 이와 같은 어근을 가진 말이 다른 지역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연구하는데, 아랍어에 이 단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뜻은 ‘말라 비틀어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보리떡 한 덩어리’는 ‘말라 비틀어진 보리 빵’이라는 뜻일 텐데요. 이 말라 비틀어진 보리빵이 딱 기드온의 군사의 처지와 같습니다. 갓 구운 따뜻한 빵도 아니고, 밀 수확을 끝낸 후 갓 도정한 밀로 만든 빵도 아닙니다. 미디안을 피해서 산지 구석구석의 척박한 땅에서 자란 거친 보리로 만든 빵, 그것도 오래전에 만들어서 말라 비틀어진 빵과 같은 신세가 꼭 이스라엘의 신세이고, 기드온과 함께한 군사의 신세입니다. 그런데, 그 빵 때문에 장막이 무너졌다는 미디안 군사들의 꿈 해몽은 그야말로 기드온에 주신 하나님의 메세지인 셈이지요. 그 준비부터 이상한 전쟁의 승리 무기도 이상합니다. 빈 항아리와 그 항아리 안에 든 횃불, 그리고 나팔이거든요. 칼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이니까요. 미디안 군사들의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횃불과 나팔 소리를 들으며 혼비백산 도망가면서 자기들끼리 칼로 싸우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하셨으니까요. 13만5천명을 상대로 300명이 싸운 전쟁,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나팔을 들고 싸운 전쟁, 이 이상한 전쟁은 바로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 에브라임의 참전과 지파들 사이의 다툼

미디안 사람들이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자기 땅으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그 때, 기드온이 에브라임에 전령을 보내서 도망가는 미디안 사람들을 앞질러 요단강에 이르는 길목을 막고 함께 싸우자고 말합니다. 드디어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미디안의 부대 지휘자였던 오렙과 스엡을 잡았습니다. 오렙은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포도주 틀에서 죽였는데 그 죽임의 장소 또한 상징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의 약탈이 두려워서 타작마당에서 밀을 타작하지 못하고, 포도주 짜는 틀에서 밀의 낱알을 손으로 일일이 털어 내야했습니다. 포도주를 짜를 틀은 바위를 깍아서 만드는데, 바위에서 죽이고, 포도주 틀에서 죽였다는 것은 약탈로 인해 당했던 고난의 상징이었던 포도주 짜는 틀이 있는 바위에서 둘을 죽임으로 이제 더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에브라임 사람들과 기드온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왜 전쟁을 할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따지는 거지요. 왜 부르지 않았을까요? 이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어 놓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요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 내가 한 일이 당신들의 한 일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에브라임이 떨어진 포도를 주운 것이 아비에셀이 추수한 것 전부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미디안의 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당신들이 한 일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한 일이 그동안 전쟁을 치룬 네 개 지파가 한 일보다 더 뛰어났다며 칭찬을 했습니다. 이 말 역시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잠시 뒤로 미루어 놓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에브라임의 마음을 풀어 준 후, 기드온과 그 군사들은 요단 강을 건너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합니다. 단 300명의 군인들로 이 큰 전쟁을 치룬 것과 이 긴 거리를 쫗아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요단 강을 건너 지친 몸을 이끌고 적들을 추격하다가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숙곳의 사람들에게 지금 병사들이 지쳤으니, 빵 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숙곳의 지도자들이 비아냥 거리면서 거절합니다. “세바와 살문나를 마치 이미 잡았다는 듯이 우리에게 말하시는 구려?” 그렇게 거절 당한 기드온이 미디안의 군사들을 추격하며 산지 동네인 브누엘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숙곳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드온의 용사들을 조롱하며 빵을 건네주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것 아시나요? 이 숙곳과 브누엘이 이스라엘 지파 중의 하나인 갓지파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르우벤 자손들과 갓 자손들은 가축 떼가 많아서 가축 떼를 놓아 먹일 만한 적절한 장소로 요단 동편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요단의 동편은 가나안이 아니지요. 가나안의 문턱이기는 하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라고 정해주신 그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를 설득하여 그 땅에 머물게 되었습니다(민 32). 그렇지만, 그 땅들은 아람, 암몬, 모압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땅이면서, 왕의 대로(King’s Highway,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를 연결하던 도로)가 지나가서 이방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인지라, 고유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과 문화가 위협을 받을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살면서 아마도 이 사람들은 요단강 건너에 살고 있는 10개의 지파들보다는 그 지역을 오가며 장사하던 미디안 사람들과 더 친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기드온과 갓지파 사람들의 대화로 보건데, 갓지파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미디안과 오히려 더 가깝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추측이지만, 그렇게 싸운 미디안 적군 가운데 숙곳 사람, 그러니까 갓지파 사람도 있지 않았나 의심스럽습니다(삿 8:14). 기드온은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사로 잡아온 세바와 살문나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떠벌였던 말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망대를 허물고 그 성읍 사람들 가운데 책임져야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형제들 끼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살상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세바와 살문나도 죽였습니다. 출애굽한 열두 지파의 공동체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이상적인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것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 기드온의 본색

이렇게 전쟁 이야기 뒤에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삿 8:28)라고 끝내는 것이 사사기의 순환구조 상으로는 자연스러운 배치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의 눈에 기드온은 그렇게 이야기를 끝낼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은 이전의 사사들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찾아와서는 “우리를 미디안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삿 8:22)라고 부탁을 합니다. ‘왕’이라는 말만 사용하지 않았지,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이 요청을 기드온이 거절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삿 8:23)라는 기드온의 대답이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이 대답은 다음 장에서 ‘아비멜렉’을 이야기할 때 덧붙여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드온은 왕으로 추대되는 것은 거절하였지만,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그 기드온이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고 은근슬쩍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획득한 전리품 중에서 귀고리 하나씩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 요청으로 들어온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1,700세겔입니다. 세겔이라는 단위가 시대에 따라서 또 지역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1,700세겔이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평균적으로 1세겔을 10g이라고 계산한다면, 17kg입니다. 거기에다가 초승달 모양의 장식품과 패물들,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을 달라고 합니다. 세바와 살문나가 타던 낙타의 목에서 초승달 모양의 장식은 이미 기드온이 떼어 가졌는데요(삿 8:21). 또 다른 낙타들의 목에 초승달 모양의 장식품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낙타의 목에 있는 그 초승달 모양의 장식품은 사슬, 그러니까 일종의 목걸이 형태였나봐요. 낙타 목이 좀 두꺼운가요? 그 낙타의 목에 목걸이를 하고 그 목걸이에 초승달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니, 그 무게가 꽤 되었을 겁니다. 또 패물들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꽤나 값이 나가는 것들이었겠지요. 왕이 되기를 거절했으나, 엄청난 전리품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기드온의 탐욕스러운 면에서 전쟁터에 네 개의 지파만을 부른 것이 조금 이해가 될 법도 합니다. 전쟁에 참전한 모든 지파의 모든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전리품을 받습니다. 승리한 전쟁의 전리품은 대단했겠지요. 그런데, 참전한 지파의 수가 많을 수록 얻게 되는 전리품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기드온은 그것이 못마땅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드온의 속내를 에브라임이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들을 띄워주는 말로 에브라임의 환심을 사려고 한 정황적인 증거가 너무나 명백합니다. 이렇게 금붙이들을 요구한 것이 단지 재산에 대한 욕심때문 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드러납니다. 기드온은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과 39장에는 에봇을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또 그 모양과 재질까지도 잘 설명해줍니다. 그런데, 에봇은 거룩한 제사장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사람입니다. 므낫세 땅에도 레위인이 살 수는 있지만, 기드온은 레위 지파의 사람이 아닙니다. 기드온의 집에 바알을 위한 제단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뒤에 그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 새로 쌓은 제단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기드온이 갑자기 레위인이 된 것도, 제사장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에봇을 만들어서 레위인의 도시도 아닌 그 땅에 에봇을 두고 공식적으로 스스로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입을 것이 아니라, 혹 제사장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입혔다고 친들, 기드온의 불순한 의도는 똑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그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나를 통하라!”라는 말이거든요. 기드온의 집에 바알의 제단이 있던 때, 그 집안은 그것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제 바알의 제단이 사라진 지금 기드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이 우리 집에 있으니, 이것으로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지지를 받는 설명은 기드온이 ‘왕놀음’을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도 제의와 정치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은 왕이 곧 제사장이었어요. 또는 왕이 신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제의와 정치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기드온이 지금 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왕이 되는 것을 거절했지만, 그 마음 속에는 왕이되려는 마음과 함께, 이웃 나라들처럼 제사장의 역할까지 모두 독점하고 싶었던 기드온의 마음을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제부터 사사의 시대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입니다. 시대를 거듭하고 사사를 거듭할 수록 이스라엘의 탐욕과 사사들의 부패가 점점 커져만 갑니다.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시대를 아파했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기드온 집안의 비극을 기록하면서 이스라엘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역사를 통해서 들을 귀 있는 사람들만이 그 역사가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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