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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삭(Shoshenq)의 카르투쉬(Cartouche)

시삭(Shoshenq)의 카르투쉬(Cartouche)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의 왕들의 이름들도 빈번히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이집트의 파라오인 시삭(Shishak 또는 Shoshonq I, ca. 945-925BCE 통치)은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왕입니다.

역사를 말할 때, ‘객관적인 역사 기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는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여지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웃 나라와 엮어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엮어 비교 연구를 하면 ‘객관적인 역사 발생 연대’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수많은 사건들이 역사적 객관성이나 그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역사’가 되려면 이런 비교 역사 연구가 필수적인데요. 이스라엘 역사의 연대 재구성을 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 바로 시삭의 가나안 침공입니다.

르호보암 왕 제5년에 이집트의 파라오 시삭이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왕상 14:25; 대하 12:2). 그리고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약탈해 갔고, 선대 왕인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이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서 성전 경비대가 대신하여 사용하였노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으면 역사적 배경을 참고하며 성경을 읽는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객관적인 역사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부족하겠지요? 그리고 르호보암 5년이 언제인지도 성경 본문에 근거한 연대구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으니 그것 조차 객관적이라 할 수 없겠구요.

‘시삭의 침략’이라는 성경의 역사 기술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때가 언제인지를 알 수 있는 이집트의 역사 기록이 발견된 때는 1799년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카르낙에서 아문(Amun) 신전을 발굴하였는데요. 신전의 남쪽 부바스티스 문(the Bubastite Portal) 옆에 7.6m 높이로 새겨진 부조에 시삭이 침공하고 점령한 154개의 도시들의 명단이 11줄에 걸쳐서 새겨져 있었습니다. 25개의 도시 이름은 파손이 심해서 읽을 수 없고, 49개의 지명은 어디인지 현재까지 알 수 없는 곳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39개 이상의 도시들은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있는 성경의 도시들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여기에서 또 주목할 만한 것은 시삭이 원정한 곳 중에서 중앙 산지에 위치한 남쪽 왕국 유다의 기브온, 벳 호론, 기럇여아림, 아얄론 같은 도시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시삭의 정복 도시 명단에는 예루살렘이 없다는 사실! 성경에는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말이지요.

시삭의 정복 도시들의 명단을 잘 들여다보면 정복한 지리적 순서대로 써 놓으려는 경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요단 강 동편 마하나임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시삭의 군대가 “예루살렘-기브온-벳 호론-기럇여아림-아얄론” 순서로 유다의 도시를 정복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또 그 순서로 기록될 법하거든요. 그런데 시삭의 부조 둘째 줄에는 예루살렘이 쏙 빠져 있어요. 그렇다면, 열왕기상 14장 25절의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역대기 12:2 참조)라는 성경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나요? 예루살렘은 유다의 수도였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라도 반드시 정복하고 지나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 텐데 말이지요. 아마도 시삭이 유다 산지를 정복하기는 하였지만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훑듯이 지나가느라 공격하지 않았거나,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르호보암이 먼저 항복하고 조공을 보내어 예루살렘 정복을 막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시삭의 부조에서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기브온-벳 호론-기럇여아림-아얄론 순서로 정복하며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서 므깃도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길을 따라 움직였다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므깃도를 정벌하고 점령하는 것은 가나안 땅 중앙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이스르엘 골짜기 길을 차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가 서로 왕래할 때 사용하던 길들이 있었습니다. 요단 동쪽에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가 있구요. 요단 서쪽에는 요단 계곡 길과 해변 길(Via Maris)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는 필요에 따라서 중앙 산지 길을 선택하기도 했지요. 이 도로들의 특징은 모두가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들이라는 겁니다. 남북을 연결하는 요단 서편의 길들을 동서로 가르지르는 평지 길이 있는데, 그 곳이 이스르엘 골짜기입니다. 상인들이나 군사들이 남북으로 움직이는 길을 따라가다가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고자 할 때는 이스르엘 골짜기가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르엘 골짜기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틀어 가장 분주한 교통의 요지라고 말할 수 있지요. 당연히 이 교통의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한 시삭이 기어이 이스르엘 골짜기의 가장 중요한 거점 도시이자 병거성인 므깃도를 점령한 거지요.

1926년에 시카고대학 소속의 발굴팀이 므깃도 예비 발굴을 하다가 우연히 시삭의 카르투쉬(cartouche)가 새겨진 돌조각을 발견합니다. 카르투쉬라는 것은 이집트 상형문자로 파라오의 이름을 기록하는 독특한 방식을 말하는 것인데요. 파라오를 악한 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기록할 때 이름 주변에 타원형의 동그라미를 그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시삭의 승리를 찬양하는 3m높이 비석의 오른쪽 상단 일부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 발굴로 이집트 카르낙의 시삭의 부조도, 그리고 열왕기와 역대기 성경의 기록도 모두가 실재했던 ‘역사’였음이 밝혀진 것이지요. 이집트 연대기에 근거한 시삭의 통치 기간과 성경에 근거한 르호보암의 통치 기간을 비교한 결과 많은 역사학자들은 시삭의 가나안 원정이 약 926/925BCE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연대는 이스라엘의 왕국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기준이 됩니다.

시삭의 카르투쉬 (Shishak/Shoshenq’s Cartouche) 다운로드

시삭
This Post Has 3 Comments
  1. 늘 귀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메일을 드렸는데, 반송이 되네요.
    혹시 사용하시는 메일이 있으실까요~?

  2. 안녕하세요.
    늘 귀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메일을 드렸는데 반송이 되어서요.
    혹시 사용하시는 다른 메일이 있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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