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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A 레위기 성경공부 시리즈 (2) 제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

BIBLIA 레위기 성경공부 시리즈 (2) 제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대 제국에서 피지배 민족을 포로로 잡아갈 때는 주로 왕족, 고위 관료들과 같은 지배계층과 기술자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중에서 왕족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잘 대우를 해 주었는데요. 그 이유는 이들을 제국의 철학과 종교로 재교육하여서 다시 그들의 땅으로 보내면 통치가 휠씬 더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도, 앗수르(앗시리아)도 마찬가지의 정책을 펼쳤지요.
에스라가 유다로 돌아오기 약 80년 전에 유다 땅에 돌아온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왔으니 참 장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문화적으로 바벨론화 된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있으나 동시에 바벨론을 포함한 주변 고대서아시아 지역의 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회막에서 주신 말씀(레 1:1)을 오롯이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제의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를 손꼽아 보라면, 에누마 엘리쉬와 아트라하시스가 손꼽힐 것입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는 인간 창조의 목적은 큰 신들을 섬기는 하급 신들이 쉴 수 있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한 것이라는 것이고, 인간은 신들의 음식을 해주며 뒤치닥 거리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 때, 인간이 신들의 음식을 해주는 행위가 “제의”입니다.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읽히던 또 다른 이야기, 길가메쉬에서는 신들이 제물 냄새를 맡고 지상으로 내려와 그 음식을 탐하며 게걸스럽게 먹는 속물같은 존재로 묘사되지요.


고대 서아시아의 신화에서 신전은 신들의 집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벨’ בבל 이라는 말은 ‘혼돈’을 뜻하지만, 아카드어로 쓰여진 에누마 엘리쉬에 의하면 ‘바벨'(바벨론)이라는 도시의 뜻은 ‘신들의 집’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바벨론의 왕들의 역대 치세들을 기록한 글들 중에는 신전을 짓는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곳이 신들에게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하는 곳이고, 신들에게 정성스럽게 음식을 대접해야하만 신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고대 서아시아 지역 사람들에게 신전은 너무나 중요한 장소일 수 밖에 없겠지요.


무너진 바벨론을 뒤로하고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바벨론을 포함한 고대 서아시아 지역 신화와 문화에 젖어 살았었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설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잠자고 생활하는 집’으로 성전을 이해하지는 않았을까요? 매일 아침과 저녁에 제의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배를 불리는 제의가 그의 백성들의 의무라는 생각으로 제의를 드리면서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감동과 감격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성전에서 드리는 제의가 부담이 되고 짐이 되지는 않았을까요? 제의(예배)의 본질을 담아 정성스럽게 모으고 기록한 레위기에서는 이같이 제의의 참 의미가 희석되어버린 유다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외치고 싶었을까요?

제의의 주체
제의의 주체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합니다. 흔히들 제의의 주체를 제사장으로 오해합니다. 제사장에게 일단 내 제물을 건네주면, 모든 것을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감당하는 제의를 상상하지요. 그러나 레위기의 율법은 그런 제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장에 나오는 소로 드리는 번제를 기준으로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과 제사장이 각각 하는 일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과 제사장이 제의 때 하는 일의 규정을 보면,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제물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토막내는 등 주도적으로 제의를 이끌어 갑니다. 반면에 제사장의 역할은 그에 비해서 그 무게감이 무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제의라는 큰 그림에서 제사장의 역할은 제의를 드리는 사람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역할이라고 해야겠지요. 무엇 때문에 왔는지, 어떤 제물을 가지고 왔는지, 그 제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떤 순서로 해야하는지를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 옆에서 알려주고 그대로 하도록 지도하는 역할이 제사장의 주된 임무입니다.
제의의 목적은 제물을 드리는 이의 부정함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한 사람의 부정함 때문에 어긋나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주체는 하나님 앞에 선 ‘나'(제물을 가지고와서 자신을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제의를 드리는 ‘나’) 밖에 없습니다. 제사장이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는 거지요. 내가 잘못했는데, 목회자에게 “목사님 내 잘못을 저를 대신해서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대신 기도해주세요.”라고 부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레위기의 제의 규정은 제의의 주체는 제사장이 아니라 바로 제물을 가지고 온 ‘나’이며,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서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제의가 드러내는 인간의 본질
제의는 신들에게 올리는 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처럼 배가 고프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속물같은 인간처럼 먹음직하고 가지고 싶은 무언가(제물)로 달래면 마음을 푸시는 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나’)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 손을 얹는 행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손은 얹으며 가지고 온 제물은 더이상 내가 가져온 가축이 아니라 곧 그 자체로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손을 얹어 안수하고 제물을 잡는다는 것은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지요.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제의와는 완전히 다른 제물 이해입니다. 신들의 식사로 동물을 잡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부정한 ‘나’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 제단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이 제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온 ‘나'(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토막을 내면서 철저하게 나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제의는 고대 서아시아의 제의(신들의 밥)와 구별되는 가장 독특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단에 제물을 태우기 전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냅니다. 내장을 씻을 때 그 냄새는 정말 고약합니다. 내장을 씻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똥들을 씻어내기 위해서 입니다. 그 냄새가 옷에 베면, 왠만하면 지워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냄새나는 일을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직접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이 인간의 본질, 제물을 가져온 ‘나’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의 겉모습은 풍성하고 유익한 털들과 가죽으로 둘러 쌓여 있고, 흠이 없고 정결한 가축처럼 꽤나 괜찮아 보이지만, 실상 그 안을 보면 이렇게 냄새나는 것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시각과 후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내장을 씻어내고 그 냄새를 맡으면서 ‘나’라는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라는 것을, 그리고 냄새나는 부정함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해를 내장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백성의 제의는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제의처럼 신들에게 식탁을 준비하는 제사도 아니고, 인간은 그 식탁을 준비하는 집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음식을 먹고 배불러 하며 포만감으로 만족하며 복을 내리는 분도 아니지요. 하나님의 백성의 제의는 냄새나는 ‘나’를 드리는 예배, 부정한 나를 죽이고 정결하게 새롭게 태어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의를 통해 배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를 죽여 태워드리는 향기를 맡으시며(의인법) 제의를 드리는 예배자의 존재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값진 소유를 드리는 제의
제의를 통해서 꼭 집고 넘어가야할 한 가지가 또 있습니다. 제물의 자격인데요. ❶ 제물은 짐승의 경우, 소, 염소, 양과 같은 네 발 달린 가축과 비둘기처럼 집에서 기르는 생명이어야한다는 것과 ❷ 흠이 없어야 한다는겁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네 발 달린 가축을 요구하시는 걸까요? 만약 구체적으로 바칠 수 있는 가축들을 규정하지 않고 그냥 ‘짐승’이라고 한다면 음식으로는 먹지 않는 야생 동물들을 잡아다가 제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적인 욕심이 아닐까해요. 소는 밭 일을 하는데 필요하고, 염소는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드는데 필요하고, 양은 털을 얻는데 필요하고, 비둘기는 연료를 얻는데 꼭 필요한 동물이니 말이지요. 내 재산으로서 가치있는 그것을 축내지 않고 제의를 드리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뭐니 뭐니해도 내 재산으로서의 값어치가 있는 가축보다는 야생동물을 잡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흠이 없는’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는다면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흠이 있는 것을 해치워버리듯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랬고요. 페르시아 시대에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공동체에서는 눈 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을 골라서 제물로 가져왔고 이것을 말라기 예언자는 분노하며 질책했습니다(말 1:8).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욕심을 아셨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꼭 집어서 소, 염소, 양, 그리고 비둘기, 집에서 기르는 한 사람의 재산(소유물)을 제물로 요청하셨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곧 ‘나’라면, 내가 애지중지하게 기르며 가치를 두던 내 생명과 같은 소유물을 드려야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흠이 없는 것이라고 구체화하셨습니다. 적어도 내가 아끼고 값지게 생각하는 그것을 드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참 제의라는 것을 선언하는 겁니다.

제물의 가치에 차등을 두지 않는 제의
그럼, 언제 소로 제의를 하고, 언제 양, 염소, 또는 비둘기로 제의를 올려드릴까요? 언제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신분과 경제적인 수준에 따라서 그 제물이 달라지는 것 뿐입니다.
자기의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가 각기 다른 경제 가치의 제물을 드리는 가장 좋은 예는 우리말 성경 ‘속죄제’라고 번역이 되는 ‘하타트’ חטאת 제의입니다. 제사장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부정해 졌을 때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그리고 공동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정해 졌을 때에는 회중의 장로들이 주도하여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립니다. 반면에 군대나 한 집안의 어른과 같은 사람이 부정해 졌을 때는 숫염소 제물을 드리고요, 일반 사람들이 그랬을 때는 그 사람의 경제력에 따라서 암컷 어린양, 암염소, 비둘기로 제의를 드립니다(레 4-5장). 게다가 비둘기 조차도 드릴 여력이 없는 사람은 고운 가루 10분의 1에바를 드려도 된다고 말합니다(레 5:11). 율법은 제의를 드리는 사람의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한 가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과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서 제물은 달라야하며, 어떠한 제물을 올려드릴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신분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진심으로 자기를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제물 자체의 경제적인 가치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가 동일하게 같은 무게로 받으신다는 겁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경제적인 사정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있었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유다 땅에서 여전히 남아서 살아가던 사람들 사이에서 빈부의 격차도 있었습니다(느 5장). 이런 경제적인 격차는 시대를 넘어서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은 제의를 드리는 사람의 경제적인 사정을 배려하며 제물의 가치에 차등을 두지 않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부정함을 정결케 바꾸는 제의 not 죄의 용서
우리나라에서도 법정 용어들은 그 뜻을 금새 알아차리가 힘든 것처럼, 제사장들의 언어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의 용례와 의미는 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용례와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같은 단어라도 레위기의 제의 율법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레위기의 제의 율법이 아닌 일반적인 이야기들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레위기를 이해하는데 어려운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단어 중의 하나가 히브리어 ‘하타’ חטא 라는 동사입니다. 우리말로는 일반적으로 ‘죄를 짓다'(sin)라는 말로 번역이 되곤합니다. 하지만, 제사장들의 제의 율법에서 ‘하타’는 ‘잘못을 저지르다'(make an error)라는 의미입니다. ‘죄를 짓다’라는 말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잘못한 것은 ‘죄’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그것은 실수입니다. 물론 실수도 잘못이지요. 부주의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 채 어떤 일을 했을 수 있습니다. 관습적으로 했던 것인데, 그것이 알고보니 그릇된 것이라고 뒤늦게 알게 될 수도 있고요. 선의로 어떤 일을 하였으나 그 결과 그릇되거나 또는 그 일의 결과로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이미 그 사람은 죽은 거지요. 율법에는 시체를 만지만 부정해 진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율법을 거슬렀으니 ‘죄인’이 되는 걸까요?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이 돕지 않은 것은 정당할까요(눅 10:25-37)? 이럴 때는 ‘죄를 지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다’ 또는 ‘실수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타’의 결과는 부정해 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하타’와 비슷한 의미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릇되게 행동하다’라는 말 ‘아샴’ אשׁם 입니다. 누구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릇되게 행동할 수 있고, 나중에 그 행동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또는 거룩한 성물이나 무언가에 대해서 그릇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든 자책감을 ‘아쉬마’ אשׁמה라고 부릅니다. ‘아샴’과 ‘아쉬마’는 모두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동사와 명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하타’, ‘아샴’, ‘아쉬마’를 모두 ‘죄’, ‘범죄’와 뒤섞어서 번역을 하면서 제의를 오해하게 했습니다. 그럼, 레위기의 제의를 이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제의는 ‘부정’을 ‘정결’하게 바꾸는 것이다.”
그럼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레위기 6:1-7가 매우 명료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잘못(חט”א)을 저지르거나 죄(מע״ל)―이웃의 물건을 맡거나 담보로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강탈하고도 (그러지 않았노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 이웃이 잃어버린 물건을 차지하고도 (나는 모른다고) 거짓으로 맹세하는 것―중에 어느것 하나의 잘못 (חט”א) 이라도 범한 사람은 잘못 (חט”א) 을 저지르고 그릇된 행동(אש״ם)을 한 사람이다. 그 일들에 대해서 죄책감이 든 날에(또는 속건제를 드릴 때) 훔친 대로, 빼앗은 대로, 자기에게 맡겨진대로, 이웃의 잃어버린 물건을 차지한 대로, 거짓 맹세한 대로 (원래의 것 가치의) 5분의 1을 더해서 배상해야한다. 그리고 여호와께 그 (잘못의) 가치에 합당한 네 가축 중에서 흠없는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와야 한다.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깨끗하게 하게한다. 그러면 그가 잘못한 일들을 용서받을 것이다.(저자 번역)

만약 강도질하거나, 이웃의 소유를 부당하게 빼앗거나, 혹은 남이 잃은 물건을 차지하고도 거짓으로 부인하거나, 가짜로 맹세하는 등의 죄(‘마알’ מעל)를 지었다면, 배상해야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율법으로 배상의 법을 제정해 놓으셨습니다(참조. 출 21-22). 만약, 내가 이웃의 양 10마리를 부당하게 빼앗는 ‘죄’ מעל를 짓고도 그에게 배상하지 않은 채,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빼앗은 양 중의 한 마리를 제물로 드린다면, 그 죄가 용서가 될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죄’의 문제는 배상해야합니다. 양 10마리를 강탈했다면, 원래의 주인에게 2마리를 더해서 12마리를 돌려준 후에 ‘그래 이런 내 모습을 보니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너무나 부정한 존재이구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부정한 모습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제의입니다.
에스라가 목도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그 이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도둑질하고 거짓 맹세로 사람을 기만하는 사회였습니다(슥 5:3). 재판은 정의롭지 못했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은 압제 당하는 사회였습니다(슥 7:8-14). 그럼에도 제단에서 제의를 드리면서 자신들을 정결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처럼 분칠하며 살았더랬습니다. 그저 제의를 올려드리는 것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고 죄지은 이들이 오히려 당당해 했습니다(말1:6-7).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시기에 이런 행태가 얼마나 횡횡하였으면, 이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들이 한 입을 모아 이런 세태를 한탄하며 규탄했을까요? 이 때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말씀,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라고 선포합니다. 무뎌진 양심과 그릇된 신앙의 행태를 품고 살아가던 이들에게 잊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이 땅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배상하고 처벌을 받으며 그 죄에 책임을 다하라! 그리고 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설 자격이 없는 부정한 사람임을 깨달으라! 그 후에 내게로 나아와 너의 부정함을 자백하라. 예배하라. 그리고 새롭게 되라. 정결케 되라!”

욕심을 내려놓는 제의
제의의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다스려야 할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제의 전 과정을 지도하고, 제물의 자격을 율법에 따라서 선별하고, 일부 제물(특히 번제)을 제외한 나머지 제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항상 값어치가 있는 무언가를 다루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이 있지요? 왜 제사장이라고 없었겠습니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는 제사장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을 잘 묘사해 줍니다(삼상2). 삶아 먹어야할 고기를 구워 먹으려고 피째 내오라고 하고, 제물을 삶고 있는 고기 가마솥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가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을 제사장들은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게 거룩하게 드려진 제물을 거룩하게 다루지 않고 자기의 배를 불리는데 급급했던 것이지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들도 과거 엘리의 아들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기사 시대가 지난들 사람들의 탐욕의 부피는 절대로 작아질 리가 없지요.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물(제물)을 제 멋대로 다루고 자기의 호주머니에 채워 넣었습니다. 무분별하게 고기를 먹고, 가죽을 챙기며 하나님의 제물로 자기 배를 채운거지요.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제사장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지적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를 사적으로 착복하거나, 봉헌물에 손을 대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에스라가 목격했던 당대의 시대상이기도 했을 겁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사람, 제사장이라면 마땅히 지켜야하는 제물을 다루는 원칙을 에스라를 통해서 제사장들에게 다시 기억하게 하고 마음에 새겨 넣게 하셨습니다. 제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예배를 인도하는 참 인도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완곡한 표현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레위기 1:1-6:7에서는 제의의 일반 규정을 담은 후, 레위기 6:8-7:38에서 다시 한번 제의를 설명하되, 제사장들이 읽고 싶어하지 않았던(?) 제사장의 몫을 제사장들에게 다시 각인 시켜 두었습니다. 번제의 제물은 모두 태우므로 절대로 손대지 못한다. 소제(곡식제사)로 드린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먹을 수 있다(6:16). 제물로 드린 가축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만이 제사장의 몫이다(화목제물, 7:34). 그리고 심지어 그 제물을 먹는 장소(회막 뜰)와 때까지도 세밀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의 규정을 반복하는 것은 레위기 두루마리를 엮게 하신 하나님의 매우 의도된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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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제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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