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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요약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요약

이 정리는 기독교계의 고전인 요아힘 예레미야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서 예수님 시대의 상황과 혼동할 수 있는 기원후 2세기의 자료에 근거한 설명들은 제외시켰습니다. 

1. “바리새” פר”שׁ 라는 명칭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다른 이스라엘들과는 구별된 참된 공동체라는 의미). 그래서 바리새파는 매우 폐쇄적인 공동체였다. 

2. 바리새파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상층계급에 속하지 않았다.

3.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서 대다수는 성서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4. 바리새파는 주전 2세기에 형성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은 마카베오상 2장에 나온다.

41 그 날,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우리를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안식일이라도 맞서서 싸우자. 그래야만 피신처에서 죽어간 우리 형제들처럼 몰살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42 그러자 일부 하시딤 사람들이 모여와서 그들과 합세했다.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고 모두 경건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43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지지하여 합세했다. 44 그래서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죄인들과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고 그들을  쳐부수었다. 이 때 살아 남은 적군들은 이방인들에게 도망쳐 가 피난처를 얻었다. 45 마따디아와 그의 동지들은 이교제단을 찾아다니면서 모두 헐어버리고 46 또 이스라엘 땅에 사는 어린이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고 47 교만한 자들을 쫓아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다 잘 되어갔다. (마케베오상 2:41-47)

* 참조.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모두 마카베오시대의 하시딤 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바리새파 운동과 에세네파 운동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다수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기원후 1세기 고정된 기도시간을 엄수하던 사람들의 공동체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5. 유대교의 문헌에서 “(예루살렘의) 거룩한 공동체” 또는 “회당의 아들들”이라고 불린 사람들도 바리새파 사람들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바리새 공동체 안에는 여러개의 작은 공동체들이 있었다.

6. 바리새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입회 규정) 한달 내지 일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시험기간 동안 정결규정(정결 규정들과 십일조 규정들)을 엄수할 수 있다는 신뢰성을 입증해 보여야 했다(바리새파 뿐 아니라,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모든 종파는 입회의 규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7.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공동식사 모임을 가졌다.

8. 바리새파 내부에는 규약이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내부 재판기구가 있었다.

9.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수는 대략 6천명 정도였다. 사제와 레위인들이 대략 1만8천명이었고, 에쎄네파 사람들이 대략 4천명이었으니, 바리새파 사람들이 규모는 크지 않았다. 

10.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다른 집단이다. 

11. 예수님 시대를 전후하여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유대교와 신약성경에서 이름을 알렸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주전 50-20년경의 샴마이와 힐렐

(2)주후 30년 경 예수 시대와 원시공동체 시대의 니고데모 

(3)예수 시대의 랍비 가말리엘 

13. 바리새파 사람들은 같은 목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따라서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에는 제사장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ㄷ르의 압도적인 대다수는 평민들이었다).

14. 바리새파 운동의 목적은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규정들을 유다 백성들에게까지도 적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바리새파 운동은 사두개파 운동의 반대 급부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종파의 순서를 굳이 나누자면, 사두개파가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을 따라 제의법들, 특별히 레위기에서 규정하는 법들을 제사장과 제의에 한정시키고자 했으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민족 전체의 삶을 위한 기준이라고 해석한다). 

15. 바리새파 운동의 중심지는 성전이었다.

16. 바리새파의 최고 수장메바케르 מבקר 라고 부른다. 

(1)메바케르는 30이상 50세 이하여야 한다. 

(2)메바케르는 율법학자였다. 

(3)메바케르는 공동체 안에서 율법을 어긴 사람들은 재판한다. 

(4)공동체 가입결정권은 메바케르만 가지고 있다. 

(5)메바케르와 바리새파 공동체원들의 관계는 ‘목자와 양’이라는 비유로 표현되었다. 

(6)공동체에 평등한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들이 없도록 관리 감독한다.

17.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하스몬 가문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불합리함을 주장하였다.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BCE 통치)가 부인 알렉산드라(76-67BCE 통치)에게 정권을 이양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산헤드린에 가입시켜준다. 당시에는 산헤드린에는 종교적인 귀족들과 세속적인 귀족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던 여자 통치자의 종교권력을 바리새인들을 통해 장악하려던 계획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본격적인 정치 전선에 뛰어 든다. 

18. 헤롯대왕은 유대 사람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고 사두개파나 다른 세속 귀족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관대하게 대우한다 (심지어 헤롯과 황제대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벌금형만을 부과하였다).

19. 헤롯대왕 당시 제사장 가문들은 헤롯의 영향력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20. 유다가 몰락할 때 즈음인 주후 66년에 유대의 모든 사법과 예배 규정은 바리새파의 규정에 따라 제정되었다 (심지어는 사두개파의 대제사장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리새파 율법 해석에 따라 제의 예식들을 진행해야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초막절에 물을 붓는 예식이 성전에서 진행된 것은 주후 66년 이후였다. 달력 전체와 오순절의 날짜 계산도 바리새파의 날짜 계산에 따라 확정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요약 정리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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